날버리고 떠난 여인

 

◆날 버리고 떠난 여인

하늘과 땅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한 유년시절은 약간의 배고 품이 있었지만 참으로 행복했다. 사방팔방 보이는 것은 하늘이요 산과 들녘뿐, 가끔 쏜살 같이 날아가는 전투기의 모습이 문명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아주 깊은 산골에서 마냥 즐겁게 뛰놀며 보낸 유년시절의 기억들만이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슴속 깊이 자리 메김하고 있다. 큰 아픔이 없이 지금 현재 대한민국 하늘아래서 숨을 쉬고 있는 것도 어린시절 마음껏 뛰논 덕분이 아닌가 한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분교였었다. 점점 학생수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초등학교로 승격되면서 학교의 모습도 바뀌었다. 1학년에서 6학년까지 1개 반만 있는 아주 작은 학교였다. 설립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학교주변에는 나무도 풀도 없었다. 운동장 역시 자갈에 흙먼지가 폴폴 나는 울퉁불퉁한 맨땅이었다. 넘어지면 바로 무릎이 깨졌다. 오전수업이 끝나면 의례적으로 운동장 자갈 줍기 등 환경정비에 동원되어 구슬땀을 흘려야만 했다. 심지어 십리도 넘는 개울가에서 돌멩이를 주어오는 일까지 강요당했다. 지금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하늘같은 선생님의 명령에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친구는 없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의 정성과 정성이 더해지면서 제법 나무와 숲이 우거지기 시작했다. 운동장도 모래를 퍼 날라 고르고 평평하게 다듬어 넘어져도 다치지 않았다. 작은 동심이 하나 되어 땀 흘려 가꾼 결과, 변해가는 학교의 모습이 소문이 나서 다른 학교의 선생님들도 견학을 오곤 했다. 자그마한 손들이 뭉쳐 가꾸고 다듬어 아름다운 학교로 만든 것이다. 곱디고운 손은 아니었지만 학교의 모습을 새롭게 바꾸어 버린 자랑스러운 손들이다.  

시골학교의 선생님들 역시 우리들의 부모님과 별 다름이 없었다. 휴일에는 농사도 짓고 방과 후에는 윷놀이를 즐기면서 막걸리도 드시는 아주 평범한 선생님들이었다. 그런 시골학교에 청색나팔바지를 휘날리며 인형 같이 아름다운 처녀 선생님이 부임하였다. 시골마을에서는 일직이 보지도 못했던 화려한 옷차림과 높은 하이힐은 우리들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선생님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늘에 내려온 천사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처녀선생님이 5학년 담임을 맞게 되었다. 바로 내가 5학년이었던 것이다. 우린 탄성을 지르며 서로 기뻐했다. 구리 빛이 나는 고리타분한 남선생님들 밑에서 막걸리 냄새나 풍기면서 가르침을 받았던 거와는 차원이 달랐다. 선생님 곁에는 항상 아름다운 향수 냄새가 우리들의 코끝을 자극했다. 인형 같은 선생님 주위에는 까까머리 머슴애들과 단발머리 가시내들이 신기한 듯 뒤를 따라 다니며 깔깔거렸다.

부임하자마자 선생님은 우리가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였다. 뛰놀기만 했지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우리들에게 공부하는 법도 아주 쉽게 잘도 가르쳐 주었다. 틈만 나면 자습이나 시켰던 선생님들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펜팔이라고는 전혀 몰랐던 우리들에게 부임하기전의 학교와 연결을 해주어 많은 친구들이 편지를 주고받곤 했다. 바깥세상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던 우리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시골학교에서 대 변혁이 일어난 것 이다.

선생님은 멀리서 부임을 했기 때문에 동내 빈 사랑방 하나를 빌려 자취를 했다. 시골에는 널려 있는 것이 반찬이고 먹을 것이 지천에 깔려있지 않는가. 시장에 갈 필요가 없었다. 고구마를 비롯하여 채소 등 좋아 하는 것들을 다 날라다 주었다. 시골에서는 콜드크림만 있어도 행복했던 그 시절 방안을 몰래 훔쳐보니 사과상자 위에 화장품이 가득했다. 선생님은 화장을 아주 짙게 하고 다녔다.   

선생님이 오시면서 꿈같은 동화의 세계가 작은 시골학교에서 조성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노래도 가르쳐 주었고 노래하며 함께하는 학습 방법이 재미가 쏠쏠하여 학교 가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특히 나를 아주 귀엽게 보았는지 아주 잘해주었다. 나 역시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선생님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싫지가 않았다. 점점 선생님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으로서 존경하는 마음보다 한 여인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한구석에는 어느새 좋아하는 마음이 눈 덩이처럼 커져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뭘 알아서 그런 감정이 있겠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의 우리들은 사랑과 존경의 뜻을 다 알고 있었다. 선생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늘 행복했다.

우리들과 선생님과의 관계를 시기라도 하듯 언제부턴가 방해하는 선생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도시의 처녀가 자그마한 시골학교에 대 변혁을 일으키자 그것에 적응하지 못한 선생님들의 방해공작이 시작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4학년담임선생님이 유독 도와주는 척 하면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방과 후에 선생님을 도와주려고 교실에 남아 있으면 우리들을 밖으로 내몰았다. 우리가 나온 후 교실 안에서 남과 여가 단둘이 있는 모습은 어린마음에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미웠다. 유부남 선생님이 점점 미워졌다. 성격도 괴팍하여 발길로 걷어차고 대나무 뿌리로 마구 때리기도 하였다.

처음엔 방해공작으로 접근을 했지만 시골산골에서 저렇게 아름다운 미모를 갖춘 선생님을 어데서 볼 수가 있단 말인가. 점점 도와준다는 미명아래 접근하여 치근덕거렸다. 같이 있는 시간이 점점 잦아졌다. 이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무리 작은 눈이지만 우리들을 속일 수는 없었다. 동네 구석구석에 포진하고 있는 친구들의 눈이 120개인데 우리들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골목마다 CCTV가 감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유부남 선생님이 자취방을 드나드는 것을 친구들이 목격한 것이다. 안 좋은 소문은 점점 것 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작은 시골마을에 소문이 퍼지는 것은 일순간이었다. 나의 작은 가슴에는 분노의 활화산이 금방이라도 용솟음쳐 하늘 높이 솟아 올라갈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밉다, 미워, 정말 밉다. 철부지 어린것들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둘만의 애정행각은 점점 도를 넘어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었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왔다. 풍성한 가을이 무르익어갈 무렵 두 분의 선생님은 우리들을 버리고 소리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교장선생님은 창피해서 어떻게 말 할 수도 없는 듯 난처해했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여러분에게 인사도 못하고 떠나게 되었다는 짧은 한마디만 하고는 눈시울을 붉힌 채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작은 학교에 두 분의 선생님이 사라졌으니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저학년을 맞고 있는 선생님들이 교대로 수업을 진행했지만 자율학습이 더 많았다. 담임선생님이 없는 교실은 어딘가 모르게 썰렁하기만 했다. 공부는 뒤 전이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담임선생님 없이 학교 다니는 것에 즐거워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중에는 교장, 교감선생님까지 나서서 수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남자 선생님이 부임하여 왔다. 검은 안경을 쓰고 나타난 선생님은 조금만 잘못해도 아구창을 양손으로 후려치는 무서운 벌을 가했다. 무서운 선생님이 부임하자 학교의 생활은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해 겨울 하얀 눈이 내리고 동장군이 맹위를 떨칠 무렵 한 장의 편지 날아왔다. 바로 천사같이 아름답고 시골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준 담임선생님에게서 온 편지였다. 발신지를 살펴보니 서울이었다. 난 선생님이 보내온 편지를 교실 앞에 나가서 큰소리로 읽어 주었다. 인사도 못하고 갑자기 떠나야만 했던 사연을 읽어 내려가자 친구들은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교실 안은 적막감이 흘렀다. 눈물을 글썽이며 흐느끼는 친구도 있었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그 이후 선생님의 소식은 아무도 들을 수가 없었다. 문뜩 선생님이 보고 싶어진다. 찾으려면 금방이라도 찾을 수 가 있지만 왠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