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엄마! 불쌍한 광주엄마 많이 도와주세요.”
우리아들 비호(아들닉네임)는 엄마가 두 명입니다.
아내가 직장생활 하는 관계로 비호가 태어나자마자 어쩔 수 없이 처제에게 맡기게 되었습니다. 마침 처제는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직장생활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비호를 돌보는 데는 그리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동서도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린 비호 걱정을 뒤로 하고 마음 편히 직장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처제 집은 같은 서울이면서도 약간의 거리가 있어서 매일 같이 비호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직장 일에 전념하다 보면 아내는 항상 퇴근시간이 일정치 않았고 집에 도착해서도 밥해먹고 집안일 하다보면 어느새 잠자리에 들 시간, 평일 날 비호를 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바삐 살다보면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주말에는 어김없이 비호를 만나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처제 집에서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곳에 갈 때는 시장을 한바퀴 돌아서 이것저것 장만하고, 특히 동서가 애주가로 안주거리는 꼭 챙겨갔습니다.
일주일 만에 보는 비호의 얼굴은 볼 때마다 새로웠습니다. 나날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부부는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처제의 요리 솜씨 또한 대단하여 저녁시간은 늘 즐거웠습니다. 시장에서 사온 야채와 고기를 갖은 양념과 함께 버무려서 아주 맛깔스럽게 술안주로 내놓았습니다. 그 덕에 동서와 저는 한잔 두잔 하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다보면 어느새 시계바늘은 자정이 넘어 새벽으로 달리곤 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해장국으로 쓰린 속을 달래고 난후 비호를 데리고 잠시 집에 와서 놀다가 저녁에 다시 보내곤 했습니다. 주말의 일과가 매주 똑 같이 반복되어도 비호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은 나날이 더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고 저녁식사를 막 하려고 하는 순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아내가 수화기를 들고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화들짝 놀랐습니다. “자기 왜 그래, 뭔 일이야” 하고 다급하게 물어보았지만 아내는 벌벌 떨고 있을 뿐 좀처럼 말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잠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나서 하는 말, 처제한테 전화가 왔는데 무조건 빨리 오라고 하면서 전화기를 끊었다고 하더군요. 갑자기 소름이 돋았습니다.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던지고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택시를 타고 처제 집으로 향했습니다.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큰 일이 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혹시 우리 비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점점 머리가 복잡해지고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아내는 저보다 더 놀랐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달리는 차안에는 적막감이 흐르고 조용할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총알처럼 달려온 택시는 길옆에 정차하여 저와 아내를 내려놓고 이상한 듯 바라보다가 이내 쏜살같이 달아났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서로 차장만 바라보고 왔으니 이상하게 생각 했겠지요. 뛰다시피 달려서 골목 어귀에 도착해보니 구급차의 경광 등이 골목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뭔 일이 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아내는 걷다말고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가슴이 떨려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전 다리가 풀린 아내를 부축하여 달려갔습니다. 집 앞에는 소방관들이 분주히 왔다 갔다 했습니다. 머리가 쫑긋 하늘 높이 솟아오르면서 공포감이 밀려왔습니다. 마음을 진정하고 살피던 중 가까이 사는 사촌 처형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우리 비호를 업고 있는 처제가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었습니다. 비호를 보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처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일일까 같이 살던 다섯째 처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목이 타는지 연신 침을 삼킨 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떨리는 가슴으로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엊그제 만해도 멀쩡했던 동서가 막 들것에 실려 나오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쓰러진 동서는 소방관들의 응급조치를 받고 병원에 실려 간 그날 이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결혼 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홀로 되다니 억장이 무너지는 처제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앞이 캄캄 했습니다. 신혼의 단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행복을 아사가 버린 하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앞이 캄캄했습니다. 다행이 일가친척들의 도움으로 장례는 무사히 치룰 수가 있었습니다. 장례를 치루고 나서 처제는 지금 사는 집에서는 무서워서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당분간 저희 집에서 같이 있기로 하고 아까운 신혼살림을 싼값에 처분해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집에는 신혼 초부터 살던 넷째와 비호를 보던 둘째 같이 살던 다섯째까지 합해서 일곱 명이 사는 대가족이 되었습니다.
동서를 보내고 난 다음부터 처제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말도 없었고 악몽까지 겹치는 바람에 불안해서 좀처럼 잠을 청하지 못했습니다.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전화벨소리만 들어도 가슴을 움켜잡고 놀라곤 하였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야 치유될 것만 같았습니다. 어느 날 결심한 듯, 처제는 더 이상 서울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아픈 상처가 자꾸만 떠오르고, 더군다나 처제가 한 두 명도 아니고 세 명씩이나 형부 집에 얹혀산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지방으로 내려가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되면 근처에 방하나 얻어서 언니와 가까이 사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했지만, 이미 서울을 떠나버린 처제의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시골에 계시는 장인어른과 상의 하여 전라도 광주에 조그만 보금자리를 만들어 내려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광주에 자리를 잡은 처제는 그 동안 비호와 정이 많이 들었는데 비호 없이 혼자 살다보니 그리움에 병이 날 것만 같다고 하면서 멀기는 하지만 계속 키웠으면 하는 마음을 전해왔습니다. 사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어디 마땅히 맡길 곳도 없었기 때문에 잠시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상경하여 비호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도시의 생활이 너무나 답답하고 복잡하여 다시 시골에 내려갔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우린 비호를 맡길 곳을 찾아 고민하고 있었었던 중이었습니다. 차라리 이참에 어머님도 시골에서 맘 편히 살게 하시고 처제 역시 비호와 함께 같이 산다면 아픈 마음이 빨리 치유될 것 같았습니다. 밤새 아내와 심사숙고 끝에 비호를 광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서울에 있을 땐 주말에 한번씩 보았는데 광주로 내려 보낸 이후 한달에 한번 보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광주를 여러 번 오고가는 사이 비호는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나서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살 쯤 되었을 때는 서울에 전화도 하고 “서울엄마 언제 올 거야” 하면서 보채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호는 처제에게 광주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처음엔 이상했지만 자꾸만 듣고 나니 광주엄마란 칭호가 왠지 다정스럽게 들렸습니다. 우리 집 큰딸은 엄마가 아니고 이모라고 가르쳐 주어도 비호는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비호는 ‘서울엄마’, ‘광주엄마’, 이렇게 해서 엄마가 두 명이 되었습니다.
어느덧 비호가 씩씩하게 자라서 현재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습니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는 “서울엄마 광주엄마 보고 싶다 언제 갈 거야” 하면서 광주엄마를 늘 그리워했습니다. 지금은 서울엄마라고 하지 않고 그냥 엄마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릴 적 그때부터 지금까지 비호를 키워준 이모에게는 지금도 광주엄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을 아픔 없이 훌륭하게 잘 키워준 착하고 예쁜 광주엄마는 아직도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혼자 쓸쓸히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 직장생활도 못하고 생활보호대상자로서 정부 보조금을 받고 겨우겨우 삶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까지 했습니다. 병문안 가던 날 비호와 우리가족은 광주엄마가 너무나 불쌍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비호는 늘 광주엄마 걱정을 하곤 합니다. 기른 정이 무엇인지 비호는 자기를 태어났을 때부터 곱게 길러준 광주엄마의 따뜻한 정을 잊을 수가 없는가봅니다. 비호는 광주엄마가 서울엄마보다 더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불쌍한 우리 광주엄마 서울엄마가 많이많이 도와주라고 늘 이야기 하곤 합니다.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광주에 전화해서 “광주엄마 아픈 곳 빨리 낳아서 건강하고 행복해야 돼” 하면서 마지막 인사로 “사랑해”라는 말을 꼭 잊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비호는 오늘도 숙제 하다 말고 전화통을 붙들고 “광주엄마 보고 싶어, 서울에 놀러와 용돈 모아놓은 걸로 맛있는 거 사줄게 사랑해” 하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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