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까시의 추억

엽총에 날아간 인생이여...

말까시 2007. 6. 5. 14:52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5학년 때, 우리 마을에는 잘못 당기어진 엽총 한발에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진 형이 있었다. 나의 형과 동창이면서 머리가 아주 뛰어나 장래가 총망 되는 형이었다. 우리 집과는 불과 10m도 떨어지지 않은 아주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었다. 집에는 과일나무도 많아서 우리가 갈 때면 하나씩 따주곤 했다. 그렇게 착하고 똑똑하기만 했던 형은 장난기 많은 친구의 실수로 한순간에 인생이 날아가 버렸다.


그 때 형들은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고등학교에 갈 부푼 마음에 즐거운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간간이 눈도 내리고 혹한의 추위로 인해 논바닥은 꽁꽁 얼어붙어 썰매를 타면서 놀기에 아주 좋았다. 눈이 소복이 쌓이는 날에는 뒤 동산에 올라 토끼 사냥도 하고 대나무로 만든 스키를 타면서 자연에 푹 빠져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형들을 따라 다니면서 노는 것이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다섯 살 위인 형들은 나에게 아주 잘해주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호주머니에서 눈깔사탕을 꺼내서 하나 주면 아주 천천히 빨아 먹었다. 절대로 깨물어 먹지는 않았다. 단맛을 오래 간직하기 위함 이였다. 그렇게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던 작은 시골마을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겨울 방학 내내 눈이 내리어 온통 들판은 흰 물결이었다. 새들도 먹이를 찾아 마을 울타리에 진을 치고 호시 탐탐 먹이 감을 노리고 있었다. 새가 다니는 길목에 투명 그물을 치어 참새를 잡곤 했다. 그러나 그물로는 많은 새를 잡을 수가 없었다. 멍청한 새대가리라고 하지만 그물 친 곳을 용케도 잘도 빠져 나갔다. 마을 어귀에는 엽총을 들고 사냥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참으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헌데 겨울이 막 끝나갈 무렵 부자 집 형이 엽총을 가지고 나타났다. 일가친척집에서 빌려왔다고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엽총을 중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철부지들이 가지고 다닌 것이다. 사고는 예견된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뭇가지에서 총알을 맞고 떨어지는 새를 보면서 박수를 치고 깔깔거리곤 했다. 털을 제거하고 장작불에 구워먹는 재미는 겨울이 가는 것이 아쉬울 만큼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날도 엽총으로 잡은 참새를 허리춤에 매달고 자랑도 할 겸해서 노는 것보다 공부를 좋아하는 똑똑한 형을 놀려주기 위해서 산 밑에 있는 집으로 찾아갔다. 총을 가지고 온 부자 집 형은 마침 엽총을 함께 있던 형에게 잠시 맡기고 똑똑한 형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똑똑한 형은 친구들이 왔다고 즐거워하며 삶아진 고구마 몇 개를 들고 나왔다. 대문이 열리고 친구의 모습이 보이자 장난기가 발동된 것이다. 고구마와 참새 그리고 엽총의 총구가 서로 어우러져 장난을 치다가 실수로 방아쇠가 당겨지고 말았던 것이다. 총알이 장전 된지도 모르고 총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논 것이 화근이었다.        


깨알 같이 많은 납 탄을 맞고 쓰러진 똑똑한 형은 리어카에 실려 읍내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하지만 의식이 없었다. 읍내의 작은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X-Ray 사진 촬영이 전부였다. 사진 속에 하얗게 나타난 납 탄은 머리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숨을 쉬고는 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다. 의사의 말은 가망이 없다고 했다. 큰 병원에 빨리 가기만을 바라는 눈치였다. 도시의 큰 병원에서 치료를 거듭한 끝에 의식을 회복했지만 과거의 기억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완전히 사라진 과거를 되살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똑똑하고 명석했던 형은 하루아침에 중증 장애자로 뒤 바뀌어 어머니 아버지도 모르는 갓난 애기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 놈의 엽총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총기관리가 그렇게 허술했단 말인가. 지금이야 경찰서에 보관했다가 사냥철에 수령하여 잠시 사냥을 하고 반납하는 총기관리가 되고 있지만, 그때 그 당시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부모님은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이일을 어찌 한단 말인가” 원망의 곡소리는 온 동내를 메아리 쳤다. 덩달아 새들도 울부짖었다. 망가진 자식을 보면 화가 치밀어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었다. 몇 번의 수술을 거쳐 납 탄을 제거 했지만 깊숙이 박힌 납 탄은 제거할 수가 없었다. 평생 납 탄을 머리에 간직한 채 살아야만 했다. 더군다나 넘어질 때 어깨뼈가 탈골 되고, 오른쪽 다리 역시 잘못된 것을 모르고 머리에만 치중하다 보니 이미 치료시기를 노치고 말았다. 팔은 덜렁덜렁 제멋대로 움직이고 다리는 한쪽이 마비되어 질질 끌고 다니는 절름발이 인생으로 바뀐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동내에 절름발이 형이 나타나자 보는 사람들마다 “불쌍해서 어쩌나, 정말 못 봐주겠네.” 하면서 혀를 차곤 했다.


사고 난 이후 세집은 송사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결국 사고를 일으킨 형은 한 동내에서 살 수가 없어 어디론가 이사를 가고 말았다. 총을 가져온 형내 하고는 볼 때마다 대판 싸우곤 했다. 그렇게 화병을 얻은 부모님은 오래 살지 못하고 불구의 아들을 남겨두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객지에 나간 형님이 있었지만 같이 살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누나 역시 가끔 반찬을 해주곤 했지만 마찬 가지었다. 절름발이 발걸음과 한손으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형은 대궐 같은 큰 집에서 홀로 외롭게 무서움을 이기면서 고단한 삶을 꾸리어 나갔다. 사지 멀쩡한 성한 사람도 시골에서 홀로 산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손으로 손수 밥을 지어먹고 사는 그 형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얼른 자리를 뜨곤 했다. 동네 아줌마들이 반찬을 해주곤 했지만 부모 없이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홀로 남은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며 아픈 마음을 달래고자 술을 가까이 하다 보니 길가에 쓰러지는 일이 잦았다. 늘 얼굴에는 상처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쇠약해진 형은 얼마 살지 못하고 총각으로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대궐 같이 큰 집 뒤뜰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평생 납덩어리를 머리에 짊어지고 살았으니 통증이 얼마나 심했을까. 밥을 먹은 들 무슨 맛이 있겠는가, 죽지 않기 위해 그냥 목구멍에 넘기는 것뿐이다. 한줌의 재가 되어 강물에 뿌리어 질 때 “차라리 편안한 부모님 품으로 잘 갔지 뭐, 안 그런가.” 동내사람들은 한 많은 삶을 마감한 그 형에게 한마디씩 하곤 씁쓰름한 듯 먼 산을 바라보았다.


“형님아! 하늘나라에서 잘 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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