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장을 잘못 찍어 날아온 재봉틀

<시골에 고이 모셔져 있는 재봉틀>
엊그제부터 제법 선선해졌다. 오늘이 말복이면서 입추다. 가을의 턱밑에 왔다고 더위가 살짝 물러 간 것 같다. 처서가 지나야 본격적인 가을이라 할 수 있다. 모처럼 편안한 잠을 잔 것 같아 개운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매일 같이 내리는 소나기 덕에 습하긴 해도 잠시 더위를 잊게 한다. 시원찮던 에어컨 바람도 냉기가 제법 목덜미까지 차가움을 느끼게 한다. 오늘을 기해서 무더웠던 여름도 내년을 기약할 처지에 놓였다.
낯선 사람들이 집집마다 방문 도장을 받아 갔다. 한낮에 말이다. 어른들은 들에 나가 집에는 아이들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다그치는 낯선 사람이 무서워 서랍장에 있는 도장을 건네주었다. 인주를 꾹꾹 눌러 서류에 찍었다. 집집마다 도장을 찍은 서류를 보여주며 아버지 도장을 가져오라 했다.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지만 도장을 찍는 것이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말에 혹하고 말았다.
며칠 후 재봉틀을 실은 트럭이 마을에 들어왔다. 건장한 청년들이 도장을 받아간 집집마다 재봉틀을 던져 놓고 갔다. 재봉틀을 신청하지 않았다 해도 막무가내였다. 도장을 찍은 서류를 보여주며 법대로 하라는 겁박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법을 모르고 배운 것이 없는 시골사람들은 어디에 하소연 할 줄도 몰랐다. 철모르는 아이들만 혼 줄 나서 야단을 맞았다. 지금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 그 당시엔 빈번하게 일어났다.
며칠 후 기술자가 들이 닥쳐 재봉틀을 조립해주고는 다달이 갚아야 할 금액을 알려주며 서류를 놓고 갔다. 은행에 납부하라는 것도 아니고 지로영수증도 아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방문 할 테니 현금을 준비하라 했다. 도장찍어간사람과 배달 한 놈, 조립한 놈, 돈 받으러 온 놈이 매번 달랐다. 주냐 마냐 실랑이를 벌이는 횟수가 잦아졌다. 인상이 험악하고 등치가 황소 같은 놈들이 돈을 주지 않으면 경찰서에 고발한다고 협박을 하고 다녔다.
악덕 상인들이 세상물정 모르는 산골만을 다니며 강매를 한 것이다. 도장을 잘못 찍는 바람에 거금이 날아간 울집은 한동안 허덕여야 했다. 현찰을 만들기 위해서 곡식을 팔아야 했고 등골이 휘도록 품팔이를 해야 했다.
엄마는 재봉틀을 이용하여 이불도 만들고 아버지 바지도 만들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도 줄이고 늘여 새것으로 만들었다. 손재주가 남다른 엄마는 옷감을 떠다가 바지저고리도 만들어 비용을 절감했다. 바늘로 옷을 만들기 위해선 몇날 며칠을 손가락이 아프게 손놀림을 해야 한다. 재봉틀은 눈 깜짝 할 사이에 바짓가랑이를 만들어 냈다. 나 역시 재봉기술을 배워 통을 줄이고 작아진 허리춤을 늘려 맵시 나는 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거금을 주고 산 재봉틀은 금방 고장이 났다. 발판의 왕복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꾸어주는 크랭크축베어링이 망가져 소음이 심했다. 지금처럼 애프터서비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읍내에 지고 갈수도 없어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덜컹거리며 돌아가는 재봉틀은 오래 동안 사랑을 받았다. 비록 강매였지만 집집마다 들어앉은 재봉틀 덕에 동내 아낙들의 일손이 한층 줄었다. 요술을 부렸던 그 재봉틀이 골동품이 되어 시골 뒤뜰에 있다. 언젠가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갈 때 거실 모퉁이에 진열해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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