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얘기

사랑은 그렇다 치자

말까시 2018. 5. 3. 11:10

◇ 사랑은 그렇다 치자

 

안 보면 보고 싶고 만나면 헤어지기 싫어 갈지자로 걷고 걸었던 것이 그때였다. 헤어지면 전화하여 목소리를 듣고 밤을 지새우며 그리워했던 그때, 아침이면 토끼 눈이 되어 출근하자마자 다이얼을 돌렸다. 밀당이란 말이 통용되던 그때 무엇이 진실인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인생 선배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란 진리를 세뇌시켰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처럼 돌진한 끝에 긴 머리를 들어 올린 그녀는 내 품에 안겼다. “책임져” 란 말과 함께 말이다.

 

요번 주 내내 식빵과 과일 몇 조각으로 아침을 때웠다. 젊은 세대들이 즐겨 먹는 인스턴트식품으로 해결하다 보니 뭔가 부족함이 없지 않았다. 칼칼하고 시원한 국물이 먹고 싶었다. “자기야 자나” 칼잠을 자고 있는 아내는 꿈쩍을 하지 않는다.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데 안 되면 라면이라도 끓여주면 안 되나” 흔들어 깨웠다. “아니 아침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부터 난리야” 사실 요 근래 아침잠이 없어 고민이다. 반면에 새벽잠이 많은 아내는 이팔청춘인지도 모른다. ​

 

먼동이 터왔다. 이불 속에서 나와야 했다. 잠자는 아내를 위해 불을 켜지 않았다. 더듬더듬 주방으로 직행 먹을 것이 없나 살폈다. 바나나와 사과가 있었다. 초코파이도 있었다. 냉장고에 먹다 남은 우유도 있었다. 꺼냈다. 일단 목을 축이고 까기도 쉽고 먹기도 좋은 바나나를 집어 들었다. 껍질을 벗겨내고 입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는다. 하나 먹는데 채 1분도 걸리지 않는다. 초코파이도 일순간이다. 목이 메어 우유와 번갈아 먹는 불편이 있었지만 워낙 작은 먹거리라 두입에 끝냈다. 깎아야 하는 불편으로 아이들은 사과를 잘 먹지 않는다. 나 역시 귀찮았다. 물에 씻어 그대로 먹었다. 달콤한 육즙이 잠시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샤워를 하고 나올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던 아내는 “아직도 자나”란 말에 고개를 돌렸다. “벌써 일어났습니다.”라며 못마땅해 한 아내는 두 팔 두 다리를 들고 마구 흔들었다. 스트레칭의 한 동작으로 아침마다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

 

머리를 말리기 위해 헤어드라이기를 강풍으로 돌렸다. 소음이 대단하다. “뭐야 시끄러워서 아무것도 못하겠네.” 짜증을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머리를 손질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로션을 바르고 있는데 살며시 다가온 아내는 “사과 먹었어. 아삭아삭 맛있게 먹는 소리가 안방까지 들리던데” 좀 미안했는지 겸연쩍은 표정이다.

 

옷을 입고 휴대폰을 집어 나가려다 말고 따져 물었다. “그래, 사랑은 그렇다 치자. 어차피 그 열매는 이미 다 따먹고 없으니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부부간의 정까지 바닥난 것은 아니잖아. 당신은 남편을 흑싸리 껍데기로 취급하는 것 같아. 당신 그때 ‘책임져’ 그랬지. 흔쾌히 대답했지만 사실 책임이란 것은 쌍방의 의무가 아닌가. 나름 성실히 임했다고 생각하는데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 더 바랠 것이 없으니 저녁에 얼큰한 김치찌개 한번 끓여보지”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약속 있는데” 헐!!! 할 말이 없었다.

 

시집 장가 간다는 말은 옛말이다. 결혼과 동시에 부모와 떨어져 사니 말이다. 예전처럼 남편에 전적으로 의지하던 시대도 지난 지 오래다. 양성평등이 시대적 욕구이다 보니 부부 역시 동등한 위치다. 가사 역시 책임이 따로 없다. 필요에 따라 분담하는 것이 진리로 굳어졌다. 요즘 무늬만 부부인 사람들이 많다고는 하나 지하 단칸 셋방에서 달콤한 사랑을 나누며 알콩달콩 살던 때를 상기하다 보면 바닥났던 사랑과 멀어져 간 부부의 정이 되살아나지 않을까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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