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걸리 한 잔은 6백 원이지만 기쁨은 6백만 불이다.
거실 탁자 위에 마른 멸치가 담긴 플라스틱 통이 있다. 주념 부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귀가하여 샤워를 한다. 미세먼지도 털어내고 목과 콧속에 이물질도 제거한다. 뻑뻑한 눈도 헹궈낸다. 마지막으로 냉수마찰을 하고 나면 여간 시원한 것이 아니다. 상쾌하고 개운하다. 이때 냉기를 머금고 있는 막걸리를 꺼내 밥공기에 따라 마신다. 밥먹기 전에 안주로 먹는 것이 바로 마른 멸치인 것이다.
엊저녁 갈매천 산책을 했다. 미세먼지가 많아 짧게 했다. 마침 아이파크가 입주했다는 소식에 가보기로 했다. 듬성듬성 불이 켜져 있었다. 후문 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사방팔방 콘크리트 성벽이 웅장했다. 중앙광장은 단차가 있어 얼핏 옥상정원을 방불케 했다. 아기자기한 공원에 나무가 우거지면 쉼터로서 역할을 톡톡히 할 것 같다. 아직 조명이 덜 설치된 듯 전체적으로 어두워 자세히 불 수는 없었다. 초역세권으로 상가가 근접해 있어서 편의성을 중시하는 젊은 층에게 인기 만점일 것 같다.
오는 길에 마트를 들렸다. 아내는 이것저것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야 늘 사는 것은 막걸리 한 통이다. 장바구니에 막걸리 한 통을 우겨넣자 아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안 마시면 안 돼. 건강도 챙겨야지. 이팔청춘도 아니면서, 주구장창 마셔대면 어쩌자는 거야” 거참 막걸리 한 통이 그렇게 건강을 해친단 말인가. 술의 폐해가 워낙 홍보가 잘 되어 맹물파로서는 아무리 긍정적인 면이 있다지만 좋게 봐줄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역시 계산하는데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밖으로 나와 이제나저제나 나올까 기다렸지만 무엇을 하는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생수를 배달 주문하느라 그랬어.” 울 집은 물소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들 붕어가 된 기분이다. 특히, 아들은 밤새 들락거리며 물을 마신다. 그놈의 깨임을 밤새도록 하니 목이 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을 끓여 마셔도 될 성싶은데 그것 또한 귀찮은 일이라며 마다한다.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했다. 워낙 미세먼지가 많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털어냈다. 소파에 앉아 ‘가요무대’를 시청했다. 7080 노래들이 정겹게 들려왔다. “아빠, 뭐야 가요무대를 보다니, 벌써 노인이 된 것 아니지” 어이가 없었다. 가요무대를 보면 노인네란 말인가. 아직 주름도 없고 피부는 니스 바른 것처럼 반질반질 한데 공주의 말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이 묘하다. 아내는 휴대폰을 조작거리며 딴 세상에 가 있었다. 공주 역시 묘한 눈치로 앉아 통닭을 열심 뜯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막걸리나 한 잔해야지' 이미 냉기를 먹음은 막걸리는 꺼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우윳빛처럼 흰 막걸리를 백옥같이 하얀 공기에 따랐다. 표면에 가스가 분출하는지 물방울이 통통 튀었다. 청량감을 안겨주는 탄산가스다.
침이 질질, 얼른 마시지 않으면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른다. 한 모금 마시고는 3초 정도 머물렀다가 목젖을 적셨다. 상큼하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액체는 쏜살같이 위장 벽을 내리쳤다. 찌릿찌릿 전해오는 전율에 머리를 흔들어야 했다. 아, 이 맛을 무엇과 견주어야 그럴싸하다 할까. 단돈 6백 원으로 상쾌 통쾌, 행복감을 만끽살 수 있는 것이 그 무엇이란 말인가. 그날 술 마신 사람과 자고 싶지 않다는 아내는 거실 여가 되어 따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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