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얘기

내 영역 침범하지 마쇼

말까시 2015. 3. 11. 14:56

 

 


◇ 내 영역 침범하지 마쇼. 

 

꽃샘추위가 장난이 아니다. 바람까지 불어대니 한겨울 추위보다 더 춥다. 두툼한 솜바지를 장롱 깊숙이 넣어 놓았는데 부랴부랴 꺼냈다. 주름잡을 겨를도 없이 입다보니 구겨진 바지로 봐서는 노숙자와 다를 바 없다. 내일을 기해 수그러든다고 하는데 가봐야 알겠다. 갑자기 들이닥친 추위로 사지가 오들오들 떨린다. 감기바이러스가 침투한 것 같다.  

 

퇴근 무렵 카톡이 왔다. 시집보내고 싶은 마누라였다. 급한 모임이 있으니 아이들과 저녁을 해결하라는 명령이었다. 불붙은 이모티콘을 날리는 것으로 심정을 토로했다.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부터 늦게 온다는 전갈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빈주머니로 상경하여 맞벌이를 한 덕에 굶지는 않았다. 가정경제에 일익을 톡톡히 한다는 아내의 위세에 대항할 길이 없다. 일방통행으로 질주하는 마눌 기관차는 언제나 멈출까.  

 

교통비를 아끼겠다고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다. 허벅지 근육에서 나오는 힘으로 힘차게 달려 도착해보니 무소속으로 변해버린 딸내미와 아들이 제비 새끼들처럼 목을 빼고 달려들었다. 이런 젠장, 날개에 힘이 붙어 날아가도 되건만 둥지에서 떠날 줄 모르는 아이들이 불쌍했다. 아이들이란 표현을 자주 하다 보니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을 잊은 채 배달 음식에 길들여져 있다. “성인이 된지 오래다. 스스로 해결하라. 이놈들아”  

 

밥통을 열어보니 바닥에 깔린 밥이 누렇게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물을 붓고 죽을 끓이지 않으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밥이었다. 박박 긁어내고 다시 할까 하다가 뚜껑을 닫아버렸다. 잡동사니가 얹어 있는 찬장을 열어보니 라면 한 개가 있었다. 떡라면을 끓여 먹기 위해 냉동실을 열어보았다. 아뿔싸, 이것들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언제 구입한 건지 모르는 고등어가 꽝꽝 얼어 있었고 삼겹살 쪼가리, 풋고추, 홍삼, 버섯, 멸치, 냉이부스러기 등 셀 수 없는 것들이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전기를 잡아먹는 하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가득채운 먹거리들이 냉동상태로 유지하려면 어마어마한 전기에너지가 필요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간신히 참고 라면으로 저녁을 때웠다.  

 

김치냉장고도 열어보았다. 성애가 가득했다. 성애 역시 에너지를 소모하는 몹쓸 여석이다. 성애를 닦아내고 점검을 시작했다. 김장김치를 비롯하여 야채, 과일, 기름통 등 먹거리들로 빈틈이 없었다. 앗, 갓김치가 밑바닥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갓김치를 재우고 있다니 또 한 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가 채울 줄만 알았지 밥상에 올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냉장고 관리를 전혀 하지 않는 아내가 야속했다.  

 

자정 직전에 귀가한 아내는 설거지를 제대로 못했다고 무어라 한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도대체 냉장고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고등어가 가득 차 있는데 왜 밥상에 올리지 않는 이유가 뭐야” 도끼눈을 뜬 아내는 “내 영역 침범하지 마쇼” 딱 한마디를 하곤 세제를 풀고 우당탕 설거지를 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이불속을 파고든 아내는 바로 골아 떨어졌다. 얼마나 재밌게 놀다 왔는지 이를 박박 갈며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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