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고 싶어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삼” “잠깐, 현관 앞에 있는 박스 들고 가셔야지” “아이! 급한데 스타일 구기네.”
박스를 들고 주차장에 내려와 보니 비가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나와서 마대자루에 담고 있었다. 박스를 던져버리고 우산을 가지러 다시 올라갔다. 짜증이 두 배다. 자전거도 탈수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선생님 이것 한번 읽어 보십시오.”
머리가 먹물처럼 까만 중년의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잡지책을 건넸다. 깡마른 그녀는 피죽도 먹지 못한 것처럼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키는 컸지만 너무나 말라 젓가락처럼 가늘었다. 회오리바람이라도 불면 제일 먼저 하늘로 빨려 올라갈 것만 같았다. “100년 된 잡지라” 하면서 “틈나는 데로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겠다.”고 했다. 많이 들어본 잡지 이름이었다. 멈칫하는 순간 명암도 주었다. 약간의 관심을 갖자 기분이 좋은 듯 살짝 웃으며 늘어진 머리를 치켜 올렸다. 머리가 뒤로 젖혀지면서 들어난 목덜미는 백옥처럼 희었다. 수녀처럼 청순한 그녀는 전철을 내리는 순간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면부지의 여인에게 인사를 받고 보니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뭉친 어깨 근육이 풀리는 것 같았다.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숨이 차지 않았다. 난 무신론자인데 왜 그렇게 흥분되는지 모르겠다. 기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빗방울을 피해 버스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에게 책을 주었을까. 전철 안에는 젊은 처자들과 산적 같이 우락부락한 사람도 있었고 후덕한 항아리 형 아줌마들도 많았는데 의아했다. 사실 난 부드러운 인상이 아니다. 눈이 가자미처럼 찢어져 날카롭고 냉혈인간이라 잡상인이 쉽게 접근하지 않는다. 책장을 넘겨보았다. 좋은 말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혹여 홍보용인가 하고 살펴보니 1년 구독료가 38,000원이었다. 값비싼 책은 아니지만 소중한 내용이 들어 있는 잡지책을 공짜로 받고 보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종교인이 아니었다면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싶은 여인이었다.
기분 좋게 사무실에 도착하여 진한 커피를 한잔 마셨다. 며칠 음주가무를 즐겼더니만 피곤이 밀려 왔다. 배속에서는 구라파전쟁이 일어나는지 끄르륵 소리가 연발했다. 화장실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은 명상하기 아주 좋은 곳이다. 아침 전철 안에서 청순한 여인에게 선물을 받아서 인지 힘주어 상기된 얼굴이 더욱더 달아올랐다. 배설의 기쁨을 만끽하고 나니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았다.
점심을 먹고 며칠째 방치한 자전거를 확인하러 뒤뜰에 나가보니 없었다. 집에 있는 것인가. 아니다. 지난주 목요일 분명 사무실 뒷마당에 붙들어 매어 놓았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열쇠뭉치만이 거치대에 걸려 있었다. 기분 더러웠다. 언놈이 끊어 가버린 것이다. 비싼 자전거는 아닌데 왠지 기분이 씁쓸했다. 아들놈이 타고 다니던 날렵하게 생긴 것으로 시장바구니가 달린 그런 자전거는 아니다. 모처럼 기분 좋아 로또를 사려했는데 다 틀려버렸다. 일찍 귀가하여 김치찌개 한소끔 끓여 소주나 한잔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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