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그 시절 봄맞이
정월 대보름이 지나갔다. 새해가 밝아 오면서 들뜬 분위기는 보름달이 지면서 가라앉았다. 봄이 왔는가. 봄 맞을 준비로 부산하지만 차가움은 그대로다. 바라다 보이는 산과 들에 생명의 빛깔이 보이지 않는다. 회색빛 능선은 한겨울을 간직한 채 칼바람을 쏟아내고 있다. 맑고 깨끗한 하늘에 새들이 바삐 날아간다. 떠나가는 새때, 다가오는 무리들, 계절이 바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기지개를 펴고 움트는 새싹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겨우내 눈 내리고 바람에 날린 먼지가 장독대에 달라붙어 지저분하다. 물걸레로 닦은 다음 깨끗한 행주로 다시 한 번 훔쳐 마무리를 해야 한다. 얼었다 녹으면서 무너진 장독대도 손을 보아야 한다. 지금이면 장을 담글 때가 아닌가. 처마에 매달린 메주가 바싹 말라 곰팡이가 피었다. 푸른곰팡이가 듬성듬성 보이지만 속은 누렇게 잘 띄어졌다. 소금물을 뒤집어쓰고 한 달 정도 숙성시키면 맛있는 된장과 간장으로 재탄생한다.
아이들이 장난을 쳤는가. 창호지가 구멍이 나서 덕지덕지 많이도 붙였다. 어라! 헌책으로 바른 곳도 있네. 황소바람을 막아내고자 급하게 헌책을 뜯어 붙였던 것이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는 날, 물을 뿌려 뜯어내고 풀을 끓여 새롭게 창호지를 발라 말린다. 따스한 햇살에 말라버린 한지는 팽팽하게 달라붙어 두드리면 통통 소리가 난다. 맑은 공기가 내통할 수 있는 한지야말로 살아 숨 쉬는 생명체에 더 없이 좋은 건축자재다.
백옥 같이 하얀 베개에 때가 잔뜩 묻어 있다. 겨우내 짓눌린 베개는 홀쭉해졌다. 속에 있는 쌀겨가 마찰에 못 이겨 부서지고 갈라져 가루가 되었나보다. 온 식구를 덮었던 커다란 이불도 모서리가 헤지고 검다. 온기를 간직하고자 밀치고 당긴 흔적이 역력하다. 두툼한 솜이불은 능숙한 엄마의 손놀림에 해체되어 물속으로 퐁당, 무수한 발길질에 검은 물을 토해낸다. 하얗게 세탁된 광목에 풀을 먹여 널어놓으면 빳빳하게 마른다. 엄마의 바느질에 새롭게 단장한 솜이불은 장롱 속으로 직행한다.
칼바람을 이겨내고자 군불을 너무 많이 지피는 바람에 불꽃이 시들하고 연기가 역류한다. 수숫대를 새끼로 말아 장대를 만들어 쑤셔 넣어 뚫어야 한다. 여러 번 넣고 빼기를 반복하면 쌓였던 재가 제거된다. 볏짚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어 빨아들이는 정도를 확인하고 마무리 한다. 시원스럽게 타 들어가는 불꽃은 방고래 깊숙이 들어가 끝이 안 보인다. 부엌은 연기 하나 없이 맑아진다.
방학이 시작되면서 사냥하고 얼음지치며 놀다보니 숙제를 하나도 안했다. 일기도 매일 같이 써야 하는데 두어 번 쓰고 말았다. 숙제는 하루 종일 투자하면 대충 마무리 할 수 있지만 일기는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밥 먹고 똥 싸고 놀았다.’를 한 달 내내 똑 같이 쓸 수 없는 노릇, 미치고 환장할 따름이다. 위와 아래를 살짝 바꾸어 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쓸 수밖에 없다. 그 많은 것을 다 읽어 볼 수 없는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며칠 지나면 봄방학이 시작된다. “야호! 만세다. 만세.”를 외치며 놀다보면 어느새 아지랑이가 보이며 봄은 나를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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