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리통의 변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유년시절에 마루 위 벽에는 소리통이 달려 있었다. 일명 스피커라 했다. 면소재지에서 삐삐 선으로 연결하여 두 개정도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지금의 케이블 라디오였다. 현금이 귀한 시절이라 사용료는 벼나 보리 등 곡식으로 대신했다. 시계가 없었던 시절 면사무소서는 정오가 되면 사이렌을 울려 주었다. 스피커는 매 시간마다 알려주어 시계 역할도 톡톡히 했다. 다른 것은 생각나지 않지만『삽다리총각』이란 연속극을 즐겨 들었던 기억이 난다.
트랜지스터라디오가 나오면서 스피커는 철거 되었다. 초등학교시절 아버지는 거금 쌀 한가마니 값을 주고 일제 내셔널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사오셨다. 음질 면에서 스피커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워낙 성능이 좋아서 북한, 중국, 일본방송까지 전파를 잡아 당겨 알지 못하는 소리까지 들려주었다. 밖에서 놀다가 5시가 가까워올 무렵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마루치아라치』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었다. 파란해골13호의 괴팍한 웃음소리는 지금도 머릿속에 깊숙이 박혀 떠오른다.
텔레비전이 등장했다. 부잣집 아니면 텔레비전을 산다는 것은 가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소리만을 듣다가 눈으로 활동사진을 보니 그 신기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김일 레슬링을 할 때면 마당에 멍석을 깔아 온 동네사람들이 함께 보았다. 김일 선수의 박치기로 나가떨어지는 외국선수들의 모습이 비추어 질 때면 저절로 함성이 울려 퍼지며 박수를 치곤했다. 드라마로는『타잔』이 인기 최고였다. 아마도 주말마다 방송한 것 같다. 동네에 몇 대 없는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구걸을 해야 했다. 동네 형님들에 밀려 다른 집으로 갔고 그곳에서 밀리면 다른 동내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다. 보고자하는 아이들이 많다보니 구멍가게에서는 극장처럼 10원을 받아 언성을 사기도 했다.
아버지를 졸랐다. 반응이 없다. 이웃집대문 앞에서 “텔레비전 좀 보여주세요.” 하며 기웃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우리보다 못사는 옆집도 텔레비전을 샀는데 왜 안사는 것일까. 졸라보았지만 허사였다. 텔레비전이 있는 집 아이들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면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술을 좋아 하신 아버지는 먹고 마시는 것에만 집착한 나머지 활동사진에 대해서는 무관심이었다. 형과 누나도 안보면 그만이지 체념한 듯 관심을 뚝 끊었다. 애간장이 탄 나는 읍내전파사에 가서 17인치 금성텔레비전을 주문했다. 갸우뚱 하던 사장은 아버지가 가져오라했다고 하니 주소를 묻곤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빵빵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커다란 박스와 함께 안테나가 우리 집 대문을 열고 들어 왔다. ‘이거 큰일 났구나.’ 겁이 난 나는 뒤뜰로 가서 숨어 버렸다. 자초지정을 들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현금을 꺼내 값을 치렀다. 슬그머니 마당으로 나와 안테나 설치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아버지도 텔레비전을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워낙 거금이라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막내의 용기가 기특했던지 “다음부터 또 그러면 혼난다.” 하고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레슬링이 한물가고 프로복싱이 유행하던 시절 나는 해설자가 되어 아버지의 궁금증을 풀어주며 유재도, 홍수환, 박종팔, 박찬히, 장정구, 유명우, 김태식 등 세계타이틀전을 즐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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