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허상과 실상
공기가 차갑다. 봄이 왔는가 싶어 서둘러 집어넣었던 겨울옷을 다시 꺼내 입어야했다. 활짝 젖혀졌던 가슴팍은 오그라들어 감겼다. 따스한 봄 햇살에 고왔던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로션을 듬뿍 발라도 윤기가 나지 않는다. 봄바람에 펄럭였던 치맛자락은 길어져 종아리를 감추었다. 보일러에 열을 주고 빠져 나온 배출 가스는 냉기와 만나 응결되어 굴뚝의 높이를 한층 더했다. 봄비가 왔었다. 눈도 내렸다. 땅속으로 스며든 습기는 움트고 있는 생명체에 원기를 불어 넣었다. 멋모르고 튀어나왔던 새싹은 어찌할 바 모르고 그대로 얼은 채 눈꽃이 되었다.
어둠이 가고 동이 트면서 들어난 길거리는 지저분하다. 밤새 짐승들이 헤쳐 놓은 쓰레기봉투는 산산이 찢어져 더러운 속살을 들어냈다. 애완용으로 키우다 버려진 개와 고양이 짓이 분명하다. 인간과 함께할 때 그렇게 온순했던 동물들이 먹이 다툼에 거칠고 사나웠다. 무리를 지어 떠도는 개들과 고양이는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질병을 듬뿍 안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인간에게 달려들지 모르는 일이다. 병들고 시들해져 가치 없는 것으로 추락했다고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는 인간의 횡포에 동물들은 신음하고 있다.
길거리가 또 지저분하다. 이면도로 구석에 취객이 토해놓은 음식물이 바닥에 얼어붙어 민망하다. 그 위에 뱉어 놓은 가래침은 뭇사람들에게 구역질을 나게 한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입안 가득히 욕을 담고 있는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흥청망청 마셔대는 연말연시도 아닌데 왜들 폭음을 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이 그만큼 살기가 어렵단 말인가. 무엇이 그들에게 과음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했을까. 독재 권력에 항거하는 아프리카의 민주화 바람에 나날이 오르고 있는 기름 값에 서민의 허리가 휘청 이고 있다. 덩달아 치솟고 있는 물가, 매달 나가야 하는 가계비용이 급상승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데나 토악질을 한다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없는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 말라했다. 법으로 강제하는 규율을 어기는 부류의 심보는 두 개란 말인가.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다 한들 그 허상이 영원히 보이 않는 것은 아니다. 눈빛에 보이고 얼굴 표정에 나타난다. 삶이 더해질수록 행동한 것들이 얼굴에 그대로 기억된다. 저장되어진 그릇된 심보는 재생하지 않으려 해도 두더지처럼 아무데서나 튀어나온다. 한번 파고든 나쁜 버릇은 본능이 되어 타인을 괴롭힌다. 숨이 멎으면서 눈을 감았을 때 선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면, 내 안에 있는 죄악들을 꺼내 버리는 것보다 좋은 일에 더 매진하여 자연 순화 되도록 정진해야 할 것이다.
책상위에 난초가 있다. 물을 언제 주었던가. 잎에는 뽀얀 먼지가 층을 이루어 녹색이 흐렸다. 수분이 부족하여 길게 늘어지고 비틀어져 볼품이 없다. 얼마나 욕했을까. 매일같이 보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버린 것이다. 물을 주고 잎을 닦아주어야 하는 마음까지 없다면 인간이 아니겠지. 늘 생각을 하고 있으나 귀찮다는 핑계로 실천에 옮기지 않았던 것이다. ‘발등에 불덩이가 떨어져야 피한다.’는 속담이 있다. 급박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려는 인간의 습성을 아주 잘 표한 것 같다. 먼 곳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것부터 관심을 갖고 널리 배려와 보살핌이 주어진다면 실상과 허상이 똑 같지는 않아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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