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냉혈인간

말까시 2007. 8. 27. 15:35
 

◇ 냉혈인간


아침부터 푹푹 찐다. 구름이 걷혔다가 다시 햇빛을 가린다. 연일 푹푹 찌는 폭염에 애완견이나 사람이나 정신을 못 차린다. 휴일 이틀 중에 하루는 산에 갔다 와야 월요병에서 해방될 수 있는데, 토요일 늦잠에 미그 적 거리다가 12시가 넘어 포기 하고 말았다. 일요일 아침 바짝 서두르지 않으면 또 못갈 것 같았다. 평소 혼자 다니곤 했는데 왠지 아내와 같이 가고픈 생각이 들었다. 덥다는 이유로 헬스도 끊고 특별히 하는 운동도 없는 아내는 나의 제의에 두말없이 따라 나섰다.  


구름을 비집고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는 강렬했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에 들이 닥칠 때마다 숨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내는 연신 손을 흔들어 열기를 시키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플라스틱 체양이 있는 모자를 깊게 눌려 쓰고 괜히 따라 나섰다고 투덜거린다. 구름이 햇빛을 가려도 열기는 매 한가지였다. 더위에 지친 사람들의 얼굴에는 오만가지 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하여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산행을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했다. 차안에는 냉방기덕에 아주 시원했다.


자주 가는 산이지만 갈 때마다 새롭다. 근 한달하고 달포 넘게 오지 못했던 서울 근교 작은 산에는 작열하는 폭염에도 불구하고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자연의 오묘한 빛을 머금고 나를 반겼다. 연일 30도를 웃도는 더위에 겁을 먹고 산행을 포기했는지 등산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길옆 좌판에는 막걸리를 비롯하여 족발 등 먹거리들로 넘쳐났다. 잠시 머뭇거리자 아내는 살 빼러 왔다가 오히려 붙이고 갈 거냐고 하면서 발길을 재촉했다. 입안에서는 벌써 침이 고여 홍수를 이루었다. 정상 주막에서 잔 막걸리를 먹기로 하고 힘을 내어 숲속으로 들어갔다.


한여름의 숲은 녹색의 기운은 가고 파란색의 향연이 온 산에 펼쳐졌다. 숲이 있어 햇빛이 차단된 그늘아래는 매섭도록 시원했다.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올라보니 일급수에만 산다는 버들치도 보였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오고가는 사람들은 더위에 힘이 부쳤는지 뜨거운 입김을 마구 토해냈다. 산 속 깊숙이 들어가 고개를 들어보니 정상은 아직도 멀었다. 아내는 모처럼 산행이어서 그런지 발걸음이 느렸다. 숨이 가빠오는지 얼마 못가서 쉬고 또 쉬기를 반복했다. 8부 능선 못 미쳐서 암자가 하나 있었고 그 아래 약수터가 있었다. 떨어지는 약수를 바가지에다 담아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온 몸이 시원했다.

 

굽이쳐 흐르는 계곡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일전에도 왔던 길인데 길을 잃고 헤맬 리는 없을 것이고 잠시 후면 오겠지 하고 그늘 아래서 쉬고 있었다. 살살 부는 바람에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갑자기 덜덜 떨면서 핸드폰 진동이 왔다. 폴더를 열고 통화 버튼을 누르는 순간 “마누라도 버리고 가는 나쁜 인간아”하면서 냅다 소리를 쳤다. 잠시 물을 먹고 앞을 보니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길은 두 갈래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다가 선택한 길이 서로 엇갈린 것이다. 


산 정상은 아니지만 능선에 도착해보니 주막이 하나 있었다. 잔 막걸리를 시켜서 입에 넣기가 무섭게 목구멍으로 넘겼다. 오장육부를 물결쳐 휘저으니 시원하면서 찌릿한 느낌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땀을 흘리고 맛보는 막걸리의 참 맛은 하늘 아래 어느 북적이는 곳의 막걸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안주로 나온 홍어 무침과 마늘종은 별미였다. 뜨거운 열기에 술기운은 금방 온몸에 퍼졌다. 그때까지 화가 들 풀린 아내는 “마누라도 내팽겨 치고 가는 손톱만큼의 인정머리도 없는 냉혈인간아” 하면서 분한 마음에 마구 눈총을 쏘아댔다. 술을 잘 못하는 아내는 연신 홍어 무침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아내는 한 모금만 마시고 두 잔을 내가 거의 다 먹었다. 취기가 올라가면서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지만 아내는 “하루 이틀 살아보냐 인간아” 하면서 연신 마늘종만 아기작아기작 잘도 먹어 치웠다.  


하산 하는 길 막걸리에 취기가 올라 기분은 좋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애를 먹었다. 못처럼 따라나선 아내는 아직도 식식거리며 투덜거렸다. 이대로 집에 가다가는 아내의 눈총에 몇날며칠 고생할 것이 뻔했다. “마나님 우리 시원한 냉면이나 한 그릇 먹고 갑시다.” 내키지 않는 듯 “그러지 뭐” 하면서 피식 웃는다.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냉면육수에 겨자를 듬뿍 넣고 휘휘 저어 아내와 난 맛있게 먹었다. 그날 산에서의 나쁜 감정은 시원한 육수에 녹아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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