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통이 된 두 개의 블랙박스
차만 있어도 좋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젠, 차종과 옵션 그리고 브랜드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한집에 두 세대를 보유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수입차도 물밀듯 들어온다. 무엇으로 갈아타야 할지 선택에 있어서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기존 옵션에 나름대로 튜닝을 하여 멋을 한층내는 오너들도 부지기수다. 그중에 블랙박스 장착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품이다.
며칠 전부터 블랙박스가 먹통이 되어 불안했다. 후방카메라 영상은 보이는데 전방영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착한지 1년 남짓, 벌써 고장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이것저것 살펴보고 만져보아도 고장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딜러 서비스로 받은 것치고는 괜찮다 싶었는데 싸구려이었나 보다.
저녁시간 식탁에 둘러앉아 만찬을 즐기는 간간이 대화가 오고 갔다. 문득 아내의 블랙박스가 궁금했다. “자기 차 블랙박스는 괜찮아. 내 것은 먹통인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아온다. “아 참, 진작 얘기한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네. 내 것도 아무것도 안 보여. 자기가 손 좀 봐줘야 할 것 같아” 이상타. 어떻게 동시에 고장이 난단 말인가. '부부는 일심동체라 했는데', 그럼 블랙박스도 서로 내통하고 있었단 말인가.
다음 날 저녁 다시 모였다. 아내 역시 “전원이 빠졌나를 확인하고 버튼 이것저것 눌러봐도 반응이 없다."라며 의아해했다. 전원에 불이 들어오는지 아니면 아애 먹통인지를 따져 물었다.
“몰라. 몰라. 자기가 밥 먹고 얼른 내려가 봐”
아내는 귀찮은 듯 말을 더 이상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자기 거 있잖아. 혹시 시가잭 빠졌는지 확인해봤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시가잭이 뭔데?”
“아니, 운전하는 사람이 그것도 몰라”
옆에서 듣고 있던 아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엄마, 공부 좀 해. 아이 창피해. 답답해 미치겠네”
듣고 있던 아내는 쌍불을 켜고 아들을 향해 융단폭격을 날린다.
“야 인마. 너 주판 튀길 줄 알아. 네가 컴퓨터만 잘했지. 주판 튀길 줄 아냐고. 건방지게 엄마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까불고들 있어”
아들은 멋쩍은 듯 아내의 시선을 피했다.
아내는 남편에게서 무시당하고 아들까지 얕보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더 이상 대화를 하다가는 대판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아 휴전을 선언하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운전석 문을 열고 앉았다. 아내 역시 동승석에 앉게 했다. '바로 이것이 시가잭'이라고 하려는 순간 뽑아져 있었다.
“아니, 이게 전원인데 왜 뽑았어?”
“난 몰랐지. 이상한 것이 튀어나와 보기가 흉해서 뽑았지”
“바로 이것이 시가잭이야. 담배 불붙이는 것이란 말이야”
“그래. 진작 좀 가르쳐주지. 내가 담배를 피워, 뭘 해. 그리고 자기도 담배 끊은 지가 꽤나 됐잖아. 당신이 불붙이는 것을 봤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 안 그래”
“맞아 맞다. 내가 무시한 것이 잘못이야. 인정한다. 근데 진짜로 주판 튀길 줄 알아. 거 다 잊어먹지 않았어?”
“나를 뭘로 보고 그러는 거야. 내가 타자, 주산, 부기 자격증이 있는 거 몰라. 무시하지 말라고.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 해도 깡그리 잊어먹지 않았다고. 당장 주판사와 봐. 시범을 보일 테니까”
아내는 시가잭이란 것을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항변을 하고는 한편으론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는지 팔짱을 끼고는 조여왔다. 그리고 시가잭이란 것이 차에 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 남의 탓만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는지 코맹맹이 소리에 애교를 섞어 “올라가면 내가 커피 타줄게”라며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