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얘기

바닥난 배터리

말까시 2018. 2. 9. 11:13

아내의 원군이 되어 사랑의 추임새를 팍팍 넣어 주었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모니터에 나타난 모습을 보니 아내였다. 그냥 열고 들어오면 뒬 것을 왜 초인종을 눌렀을까? 열림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사라진 아내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빨리 못 여남. 무거워 죽겠는데” 아내의 양손엔 무엇인가 들고 있었다. 얼굴에는 불만 섞인 모습을 그대로 이마에 내 천자를 그었다. “아이고 힘들어 주겠어. 자기가 상 좀 차려” 아내는 식탁에 쇼핑백을 올려놓고 사라졌다.

 

쇼핑백을 열어 보니 내가 좋아하는 막걸리도 있었다. 돼지고기도 보인다. 아들놈도 무엇이 궁금한지 옆에 서서 지켜보더니만 원하는 것이 없는 것으로 확인하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일단 막걸리를 냉동실에 보관하고 본격적인 상차림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단품 하나만 잘 만들어 내놓으면 만찬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여러 반찬 만들어 봤자 설거지하는 것만 귀찮아 질뿐, 입이 짧은 우리 가족에게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한다.

 

김치냉장고를 열어보니 오리훈제가 있었다. 아직 개봉 한번 하지 않은 훈제는 진공 포장되어 잠자고 있었다. 개봉하여 얇게 썰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았다. 고춧가루를 뿌려 색깔을 입혔다. 지글지글 기름이 마구 튄다. 올리브오일과 오리기름이 섞여 구수한 냄새를 뿜어냈다. 최고조로 열이 올랐을 때 후추와 채 썬 양파를 투하했다. 두어 번 썩어 볶은 다음 접시에 담아냈다. 깨소금을 뿌려 멋을 냈다.

 

“아!!.. 침 나온다.” 아내의 말이다. “위장이 춤을 추워 견딜 수 없다."는 아내는 폭풍 흡입했다. 허기진 배를 일으키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오늘 있었던 사건 사고를 이야기하며 침을 튀겼다.

 

“자기야! 있잖아. 오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고객과의 다툼이 있었는데, 내가 중재하는 과정에 상사도 끼게 되고 일을 저지른 당사자의 불성실한 답변에 꼬이고 꼬인 실타래가 자꾸만 얽히고설켜 애를 먹었거든, 나이도 어린 당사자가 바득 바득 대드는 바람에 미쳐 죽을 뻔했어. 결국, 어렵게 풀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우울모드로 에너지가 정말 바닥났어. 내 머리가 푸석푸석하지. 열받아 자꾸 머리를 올리는 바람에 산발이 된 거야. 근데 오리볶음 맛 죽인다. 레시피 어디서 배웠어”

 

“그랬구나. 그래서 얼굴이 일그러졌구나.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어.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댄데, 고객을 하늘같이 모셔도 돈 벌어먹기가 장난이 아닌데,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보군. 나쁜 사람 같으니라고” 아내의 전적인 응원군으로서 기를 팍팍 살려 주었다.

 

아내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사이사이 “맞아, 그렇지, 자기가 잘했어” 등 추임새를 넣어 가며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어느새 한 통을 다 비웠다. 그 사이 아내는 완충되어 천군만마를 얻은 듯 언성이 높아졌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네” 핏기 없이 창백했던 아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늘, 만찬 대만족이야, 역시 특식은 자기가 전문이야”라고는 설거지를 위해 앞치마를 둘렀다.

 

설거지하는 동안 원두를 갈았다. 물을 팔팔 끓여 아메리카노를 만들었다. 갈색톤 물이 마구 쏟아졌다.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벌겋게 달아 오른 하이라이트에 올렸다. 열을 잔뜩 머금은 커피는 그 향이 남달랐다. 가뜩이나 식을까 커피 잔을 뜨거운 물에 데워 커피를 따랐다. 양손으로 커피 잔을 거머쥔 아내는 “음!! 거피 향이 쥑인다. 죽여”라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은 아내의 코 평수를 두배로 늘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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