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예기치 않게 누명을 쓰는 경우가 있다. 억울하여 해명에 해명을 거듭하지만 밝혀지기까지 몹시 괴롭다. 옥신각신하다 보면 대판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다. 진실이 밝혀져도 그 대미지가 상당하다. 보상받기도 쉽지 않다. 옛말에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 매지 말 것’이며, ‘참외 밭에서 구두끈을 매지 말라’ 했다. 본 것도 아니고 증거도 없는 일에 누명을 쓰고 있는 나는 CCTV라도 달아야 할 판이다.
“여보!” 나를 부르는 아내의 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당신 이리 와 봐. 내가 그랬잖아. 앉아 싸라고, 이게 뭐야. 누리 띵띵 밀라 비틀어진 것 안 보여. 당신 뒤치다꺼리하느라 내가 등골 다 빠지게 생겼어. 당장 물 뿌려 청소 안 하고 뭐 해” 어이가 없었다. “뭔 소릴 그리 섭하게 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조심해서 일을 보는데, 울집 성비가 50:50인데 나라고 단정하면 안 되지. 증거도 없잖아” 난 청소를 못한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오늘은 반드시 범인을 잡고야 말겠다는 아내는 아들 방으로 직행, “존 말할 때 순순히 말해. 네가 그랬지. 빨리 이실직고 안 하고 뭐 해” 게임에 열중인 아들을 다그쳤다. 아들 역시 그런즉 없다고 펄쩍 뛰면서 “나가, 나가”라고 큰소리로 외친다. 화가 치밀어 오른 아내는 말 폭탄을 쏟아낼 듯이 입을 실룩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우당탕탕 소음을 내며 변기통을 청소하는 아내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이놈의 고추들을 가위로 싹둑 잘라버려야지. 내가 못 살아, 못 산다니까” 아내의 거친 말에도 아들과 나는 숨죽인 듯 침묵을 지켜야 했다.
청소를 다 하고 나온 아내는 과학적인 검증을 하겠다며 인터넷을 뒤졌다. “두고 봐라. 내가 반드시 범인을 잡고 말거야. 솔로몬의 법정에 세울 것이니까. 두 남자, 긴장들 하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검색에 열중하던 아내는 "옳거니"를 외치며 손벽을 친다. 비법을 찾아낸 것 같았다. DNA검사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제외하고 변색범위를 측정할 수 있는 키트가 있다며 조만간 구매하여 실험에 임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아내와 공주는 동계올림픽을 즐기느라 미동도 하지 않는다.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푹신한 소파에 누워 올림픽을 즐기는 공주는 일어날 기색이 없다. 아내는 반듯한 자세로 시선 고정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 자리를 잡아 앉는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손을 넣어 꺼내 보니 슬리퍼였다. 아내를 쏘아 보며 “아니! 이 더러운 슬리퍼를 소파에 놓으면 어떻하라고” 때는 이때다 싶어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아내는 어이가 없다며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누구한테 누명을 씌우는 거야. 범인은 당신 옆에 있는 공주마만데. 당장 최소해”라며 용기 충천해 있었다. 미안했다. 딸내미는 피식 웃으며 즐기는 눈치다. 밉지 않다. 오히려 귀엽다.
그날 저녁 누명을 잘 못 씌운 죄로 벌을 받아야 했다. 저녁 만찬을 준비하라는 아내의 명령이다. 공주마마 역시 요즘 허깨비가 보인다며 고단백 음식을 주문했다.
냉동실을 뒤져 보니 먹다 남은 소고기가 있었다. 육개장을 끓이기로 했다. 소고기, 양파, 대파, 표고, 멸치대가리, 다시마를 넣고 육수를 만들었다. 다 익은 소고기를 잘게 찢어 양념했다. 아내의 손을 빌려 찜닭도 만들었다. 그날 저녁 누명으로 소원했던 집안 분위기가 육개장과 찜닭으로 만찬을 즐기는 사이, 화기애애, 호호, 하하 웃음꽃이 만발했다. 키트를 산다는 것도 없던 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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