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망자의 미소

말까시 2018. 2. 6. 11:43

◇ 망자의 미소는 백합처럼 화사했다.

 

이거 원 참네, 추워서 아무것도 못하겠다.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요즘, 어디 한번 가려면 중무장하는데 시간 꽤나 걸린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짧은 스커트를 입은 처자들이 보인다. 칼바람이 부는 대로를 서슴없이 나 댕기고 있는 것을 보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는지 모르겠다. 멋쟁이들은 계절을 구애 받지 않고 멋을 내는 나름 노 하우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얼굴만 내밀고 추어 못 살겠다는 듯이 잔뜩 웅크리고 종종걸음을 하는 청춘들도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발효되는 한파주의보는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 이 겨울에 더욱더 움츠려 들게 한다. 천년만년 이어온 삼한사온이란 진리는 무술년에 와서야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이제 입춘도 지났으니 동장군이 횡포를 부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어제저녁 늦게 친구 장모님의 부고를 받고 조문을 다녀왔다. 워낙 추운 날씨가 이어지다 보니 나다니는 차들이 별로 없었다. 가속페달을 깊숙이 밟아 속도를 냈다. 갑자기 어둠 속에 나타난 덩치 큰 화물차들이 굉음을 내며 느림보 행보를 했다. 답답하다. 가속페달을 밟아 추월선으로 진입하는 순간 마주 오는 불빛이 여간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화물차 뒤만을 따라 가다가는 밤새 길바닥에서 허덕여야 할지도 모른다. 의지와는 다르게 추월선을 넘나들며 달린 달구지는 일순간에 목적지 다달았다.

 

시골 장례식장은 주택가에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에 있다. 가로등도 없는 시골길은 암흑 그 자체다. 소싯적 처녀귀신이 나타나곤 했다는 구름 고개를 넘을 때는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불빛에 나타나는 비닐 조각도 귀신으로 보였다. 귀신이란 존재를 인정하지 않지만 산길 내내 오만 잡생각은 식은땀을 만들어 등줄기를 적셨다.

 

저 멀리 불빛이 보였다. 장례식장을 알리는 네온 불빛이었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팔랐다. 오래전에 와보았던 길이지만 생소했다. 커브에서 갑자기 나타난 헤드라이트 불빛이 마주 치자 멈칫했다. 마주 오던 차가 길을 터주었다. 고마웠다. 시골길에서 잘 못 비껴 주다가는 고랑에 빠질 수도 있다.

 

산 아래 주차장은 넓었다. 차들이 빼곡했다. 조명들이 있었으나 넓은 주차장을 환하게 하는데 는 역부족이었다. 어둠을 더듬어 헤집고 빈자리를 찾아 무사히 주차를 했다. 워낙 추워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연기를 빨아대는 애연가들은 빨간 반딧불을 만들어 냈다.

 

망자는 웃고 있었다. 상주 역시 슬픈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95세 8남매를 둔 빙모는 천수를 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숙한 분위기에 향불을 붙이고 잔을 올리고 일어나는 순간 영정사진이 눈앞에 다가왔다. 유난히 굵게 파인 주름살, 작아진 얼굴, 몇 가닥 남지 않은 흰머리는 인생역정이 순탄치 않았음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하얀 머리를 곱게 빗어 넘겨 말아 올린 머리에 비녀를 꼽은 모습이 일직이 돌아가신 큰어머니를 연상케 했다. 잠시 머물다가 예를 갖추고 돌아서는 순간 검은 띠 사이로 드러난 빙모의 얼굴은 활짝 핀 백합처럼 화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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