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매지구에 영화관이 없는 것은 상상하기 싫다.
요즘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바람에 극장가에는 피서 겸 영화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가정용 전기는 누진 관계로 멋모르고 가동했다가는 요금 폭탄을 맞기 십상이다. 계곡을 날마다 갈 순 없다. 계곡처럼 신선한 바람은 아니지만 더위를 이기기 위해서는 영화관만 한 곳이 없다. 에어컨 가동을 최대로 올린 영화관은 춥기까지 하다. 반바지 차림으로 들어온 젊은 처자들은 수건이나 휴지로 무릎을 덮는 모습도 보인다.
소름이 오싹하게 돋아나게 할 수 있는 영화들이 극장가를 강타하고 있다. 좀비를 다룬 ‘부산행’, 아내와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다. 부산행 KTX에서 벌어지는 좀비와의 사투는 그 소재가 주는 신선미로 몰입에 몰입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좀비들의 이상한 몸짓은 눈길을 사로잡았고 생과 사의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휴먼 드라마는 더위를 이기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마지막 사투에서 아이와 임산부를 구하고 철길 속으로 사라진 공유의 살신성인 정신은 아전인수에 혈안이 된 현대인에게 경종을 울렸다.
‘인천상류작전’을 보기 위해 새벽잠을 반납하고 극장으로 나섰다. 조조를 보기 위한 사람들은 남녀 불문하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아침에 쓰레기를 버리는 풍경과 흡사하다. 아마도 세수를 하지 않고 나오는 바람에 추한 모습을 감추기 위함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입술만을 빨갛게 칠한 사모님들은 누가 볼까나 모자의 채양을 자꾸만 내렸다. 빨리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마음에 연신 시계를 쳐다본다. 영화는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별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제이슨 본’ 아이들이 보는 영화를 중년인 내가 즐겨 볼 수 있을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주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도서관을 갈까 했는데 덥기는 마찬가지라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포기했다. 선풍기 곁을 떠나지 못하는 아내는 숨을 헐떡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물을 마셔보지만 그때뿐이다. TV 시청에 열을 올리고 있는 나를 원망이라도 하는 듯 눈을 흘기곤 한다. 가자,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알을 보자. 캐주얼 복장으로 나선 나와 아내는 군모를 눌러 쓰고 극장을 찾았다. 젊은이들이 태반이다. 좀 민망한 마음으로 보긴 봤는데 남는 것이 없다.
밤이 깊었음에도 더위는 식을 줄 모른다. ‘덕혜옹주’를 볼까 말까. 숨이 턱턱 막힌다. 아이들이 거실로 모여든다. 잠시 에어컨을 가동했다. 냉기가 시원찮다. 불만투성이인 아이들은 용량이 큰 것으로 바꾸자고 한다. 그럴 순 없다. 금년과 내년만 버티면 겨울왕국이나 다름이 없는 갈매지구에 입성하는데 거금을 들여 교체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뾰로통한 아이들에게 심야영화를 보자고 했지만 거절한다. 영원한 동반자 아내를 대동하고 극장으로 갔다. 이럴 수가, 극장 로비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득 메운 인파는 영화가 시작되면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 갔다. 나라 잃은 설움에 한 맺힌 삶을 살아야 했던 옹주의 일대기는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보는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 혼났다. 아내는 눈물을 닦느라 화장지를 꺼내기를 반복했다.
갈매지구에 영화관이 들어온다는 현수막을 보지 못 했다. 별내신도시에는 1,2,3관을 갖춘 메가 박스 별내점이 입점해 있다. 관람객이 많고 적음을 떠나 영화관이 없다는 것은 역사 문화도시로서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다. 가까이 상봉동에 나가면 대형 극장이 있긴 하지만 반바지 차림으로 나가기에는 왠지 먼 감이 있다. 중심 상업지구에 입점을 구상 중인 영화사가 없을까. 가까운 거리에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소극장이라도 들어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