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반찬 “엄마 아빠가 뒤바뀐 우리집, 아빠는 늘 바쁘다.” 여름이 절정에 이르렀다. 사무실에 빈자리가 보인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된 것이다. 냉방기 없인 하루도 살기 어려운 도심에서 삼시세끼 챙겨먹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작년 겨울에 담은 김장김치가 아직까지 식탁에 오르고 있다. 고춧가루가 뚜껑에 말라 비틀어져 있고 수없는 젓가락질에 김치는 제 모습을 잃었다. 가뜩이나 입맛없는 삼복더위에 뚜껑반찬이 즐비한 식탁을 보니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그래 내가 한번 김치를 담아 보자’ 마트로 달려갔다. 토마토, 수박, 참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마트직원들은 하나라도 더 팔고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열무한단, 풋고추, 마늘, 생강, 쪽파를 바구니에 담았다. 그냥 나올까 하다가 막걸리 한 병도 챙겼다. 옆에 시원한 맥주도 보인다. 김치 재료 사러 왔다가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한보따리가 되었다. 열무에 묻어 있는 흙을 털어 냈다. 먹기 좋게 토막 내어 세척 하고 소금을 뿌려 숨을 죽였다. 쪽파도 다듬어 소금을 뿌렸다. 생강, 마늘, 밥한숫가락, 풋고추, 양파를 믹서에 넣고 갈았다. 이렇게 해서 양념준비는 끝났다. 한 시간 정도 지나니 열무가 절여졌다. 맑은 물에 헹구어 바구니에 담아냈다. 푸릇푸릇 보기 좋았다. 김치는 손맛이라 했다. 비닐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버무렸다. 너무 많이 버무리면 풋내가 난다 해서 서너 번 뒤적거리고는 플라스틱 통에 담았다. 맛을 보았다. 무맛이다. 거실에서 하루저녁 푹 익히면 맛이 날 것이다. 김치는 적당한 염도와 알맞은 양념이 만나 숙성하는 과정에서 오묘한 맛을 낸다. 젓국을 넣을까 하다가 순수 소금으로만 맛을 내기로 했다. 바닥에 떨어진 소금을 줍고 물기를 닦아내는 것으로 김치 담는 것을 끝냈다.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반찬통이 즐비했다. 하나 같이 뚜껑이 있는 반찬통이다. 랩으로 쌓여 있는 것도 있다. 오래된 반찬은 버릴 만도 한데 식탁에서 보지 못한 반찬들이 구석구석 박혀 있었다. 먹지 않는 반찬들을 모아 찌개를 끓일 때 사용하면 특별한 양념을 추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내는 전혀 생각이 없는 것 같다. 10원짜리 욕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냉동실은 더 가관이다. 설 때 가져온 떡국 떡이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봄에 시골에서 캐온 달래도 서리를 맞고 구석에 처 박혀 있다. 제조년월일을 알 수 없는 시루떡은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이렇게 먹지 않는 음식들로 가득한 냉장고는 에너지를 갉아먹는 하마다. 맞벌이 한다는 핑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더니 개판이다. “내 영역이니 관심 끄시지요.” 한마디 던진 아내는 안방으로 사라진다. 열무김치가 맛있게 익었다. 갓 지은 쌀밥에 파릇파릇 열무김치를 얹어 오물오물 씹어 먹는 맛은 꿀맛이다. 이른 아침 찬밥에 열무를 썰어 참기름 한 방울을 떨어트리고 비벼먹는 것도 별미다. 요즘 우리 집 식탁에는 김장김치가 사라졌다. 가끔은 두루치기도 하고 닭볶음탕을 비롯하여 육개장으로 식탁을 즐겁게 한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뒤바뀐 거꾸로 된 세상이라”며 특식을 주문하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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