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이 오는 들녘
컴컴한 새벽길 비가 내린다. 우산위에 우두둑 소리가 멈추더니 하얀 눈으로 바뀌었다. 꽃 피는 춘삼월에 눈이 웬 말인가. 부풀어 올랐던 꽃망울이 다시 수그러들었다. 고개를 내밀었던 새싹들도 땅속으로 숨어버렸다. 하얀 넓적다리를 드러내놓고 설래바리 치던 초미니 가시나 들도 쫄 바지로 갈아입었다. 갑자기 찾아온 싸늘한 기온과 비와 눈이 덩달아 내린 덕에 아침길이 혼란스러웠다.
파릇파릇 보리 싹이 올라와 땅을 덮고 있다. 가을에 씨 뿌려 겨우내 싹을 틔우고 조금만 기온이 상승해도 푸름을 전해주는 보리는 봄을 느끼기에 좋은 식물이다. 언제부턴가 웰빙식품으로 변해 보리밥집이 늘었다. 몇 해 전부터 시골 곳곳에 보리밭이 보이기 시작했다. 찾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밀과 함께 봄의 언덕을 푸르게 만들었던 보리는 시골풍경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누렇게만 보였던 밭고랑에 새싹이 올라오고 있다. 덤불속을 드려다 보니 냉이가 수북이 숨어 있었다. 아직 찬바람이 불어 납작 엎드린 떡잎은 가냘프기 그지없다. 작년에 농사를 위해 바닥에 친 비닐이 그대로다. 바람에 찢기고 날리어 정신이 없다. 가지런히 수거하여 보관했다가 폐기물 처리업자에게 보내야 하는데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비닐 때문에 농촌 환경이 말이 아니다. 지주 역할을 했던 철제 파이프도 널브러져 있다. 금년농사를 위해 서둘러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겨울 내내 한 번도 가동을 하지 않았는지 경운기 위에 먼지가 자욱하다. 로터리는 밭둑에 내팽겨 쳐져 잡초가 무성하다. 꿩들이 보금자리를 틀었는지 인기척에 놀라 후다닥 달아난다. 겨울동안 고생했던 고라니가 신났다. 밭고랑마다 새싹이 돋아나고 보리 싹이 웃자라 먹이를 찾아 헤멜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개나리, 진달래가 피기 전에 울타리를 치지 않으면 야생동물에게 다 빼앗기고 말 것이다.
담벼락 밑에 달래가 보인다. 양지 바른 곳이다. 제법 키가 커서 뽑아 먹을 만 했다. 하우스를 치지 않았음에도 녹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면 담벼락이 찬바람을 막아 준 것이 아닐까 싶다. 뒤뜰에 정구지도 싹을 틔었다. 시골 뒷문에 쳐진 비닐을 걷어야 할까. 노인들이야 워낙 추위를 타기 때문에 사월까지는 그대로 나두어야 할 것 같다. 봄이 왔다고는 하나 보일러는 멈춤 없이 돌아가고 있다.
들녘에는 생명이 움트느라 아우성인데 산은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주말 수락산에 다녀왔다. 기차바위 옆 그늘에는 얼음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그늘진 곳은 한겨울이었다. 아이젠 없이 덤빈 아낙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발 한발 옮길 때마다 비명을 지르게 했다. 낙엽위에 내린 눈이 녹지 않았고 경사도가 있어 여간 미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숱하게 다닌 수락산길이지만 그날만큼은 겁이 덜컹 났다.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봄은 여인들의 치맛자락에서 느낄 수가 있다고 하는데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이 보이지 않으니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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