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얘기

오만원을 강탈 당했다.

말까시 2014. 11. 10. 15:24

 


◇ 라면 하나에 오만 원을 지불하고 얻어 먹었다. 

 

주말에 산에 갔다가 하산 후 뒤풀이 과정에서 과음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산행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일터를 떠난 후 자연스런 분위기에서의 오름은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다. 차가움이 앗아간 단풍은 시들해져 볼품이 없었다. 낮은 곳에는 아직도 붉은 기운이 조금 남아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항상 적기에 가지 못하는 단풍놀이, 자연의 아름다움이 한물갔다고는 하지만 사람들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고운 색이 있어 좋았다.  

 

늦은 저녁 집에 도착하여 소파에 쓰러졌다. 배낭을 정리하고 옷을 벗어 세탁기에 넣어야 함에도 벌렁 나자빠져 있으니 아내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아이들도 문을 꼭꼭 걸어 잠가 놓고 인기척이 없다. 차가운 공기가 거실을 감싸 않은 채 여차 하면 폭발 할 것 같은 아내의 모습이 어슴푸레 보인다. 몸이 따르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았다. 마침 드라마가 시작되었기 망정이지 아내의 잔소리는 밤새 이어질 뻔했다.  

 

다음 날 아침 속이 쓰리고 아팠다. 해장국을 끓여 달라 했더니만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다. 목이 말랐다. 냉장고에 있는 귤을 한주먹 쥐어 까먹었다. 갈증이 해소되고 더부룩한 속이 가시는 것 같았다. 자고 있는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비비며 귀찮게 한다고 투덜거린다. “엊저녁 일 생각나지 않냐”며 “미워서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 않다”고 한다. 이일을 어찌 한단 말인가. 속 풀이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거실에 나가보니 배낭이 입을 벌린 채 나뒹굴고 있었고 등산복도 아무렇게나 벗어져 널브러져 있었다. 신발 하나는 마룻바닥을 반쯤 걸쳐 뒤집어져 있었다. 정리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머리도 아프고 힘이 없어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워 잠을 청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두통이 심하고 니글거리는 속이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매콤한 국물이 생각났다. “아이고 나 죽겄네. 라면 하나면 끓여주소” 끙끙 앓는 소리를 했다.  

 

심각한 낌새를 차렸는지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난 아내는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한동안 머물러 있더니만 돈을 달란다. “수고비를 주면 라면을 끓여주겠다”는 아내는 비장한 각오를 한 듯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돈을 주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채근했다. 오천 원도 아닌 오만 원을 달라고 하는 아내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속 풀이를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거금 오만 원을 지불하고 라면 한 그릇을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오만원의 효과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라면을 대령하고 감을 깎아 주는 것으로 끝났다. 커피한잔을 타달라는 것도 거부하고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 없을 때 돌리면 안 되냐”고 부탁했지만 “한가한 사람 아니라”며 계속하여 소음을 일으켰다. 오만원의 가치가 이렇게까지 추락했단 말인가. 너무나 억울하고 기가 막혔다. 이미 나가버린 오만 원을 빼앗을 수도 없고 해서 생각을 접었다. 적어도 하루정도의 서비스를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지갑을 열었던 것인데 큰 오산이었다. 라면 하나를 오만원에 사먹은 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