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까시의 추억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말까시 2014. 10. 31. 10:27

 


◇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언제 부턴가 시월의 마지막 밤을 성탄절 못지않게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유행가 노랫말이 스피커를 탄 이후부터 벌어지는 현상이다. 국경일에 얽힌 이야기는 몰라도 《잊혀진 계절》은 누구나 한 번쯤 흥얼거릴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계절의 끝 무렵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심금을 울린다. 낙엽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시월이 오면 그녀와 함께한 추억이 생각난다. 

 

그녀의 긴 머리는 유난히 빛났다. 석양이 물들 무렵 나타난 그녀는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하얀 목덜미를 볼 수가 없어 아쉬웠지만 어깨선을 따라 늘어진 스카프는 가슴팍을 뛰게 했다.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빠져 나갔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자 차량이 많아졌다. 저수지 제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억새가 하얀 꽃을 피워 바람에 흔들렸다. 억새꽃 하나를 꺾어 그녀에게 주었다. 살며시 미소 지며 받아든 그녀는 즐거워했다.

 

저수지 수면위로 무수히 많은 불빛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움직이는 불빛을 따라 제방을 걸었다. 일렁이는 바람에 흔들린 수면은 불춤을 추웠다. 어느 샌가 손과 손이 맞닿은 곳에는 땀이 고였다. 걷다 보니 배가 고팠다. 저수지 옆에 과수원 식당이 있어 들어갔다. 사람들은 과수원 곳곳에 만들어 놓은 들마루에 앉아 고기를 구워먹고 있었다. 구수한 고기 냄새가 미각을 자극했다.  

 

밤공기가 찼다. 풀잎에 맺힌 이슬은 구두를 적셨다. 방갈로에 자리를 잡았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풀벌레 소리는 시골 깊숙이 들어와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 역시 시장기를 느꼈는지 입맛을 다셨다. 가슴팍에 꽂혀 있는 억새꽃은 바람에 흔들리고 불빛에 빛났다. ‘귀엽고 예쁘다.’ 마음속으로 무수히 외쳤다.  

 

연변약산에 진달래 아줌마가 다가왔다. 특이한 억양으로 말을 건네는 아줌마는 일에 지친 듯 표정이 없었다. 주문을 받고는 쏜살 같이 달려간다. 물을 따라 한숨에 들이켰다. 그녀 역시 일순간에 비웠다. 빈 물 컵에 다시 물을 채웠다. 노랗게 빛나는 전등에 하루살이가 날아들었다. 손사래를 치는 그녀의 손은 백옥이었다. 아까부터 뛰기 시작한 가슴은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또 다시 물한컵을 비워야 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녀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가방에 넣었다. 가늘게 뻗은 목덜미는 희고 고왔다. 그녀를 감상하는 것이 고기를 구워 먹는 것보다 더 좋았다. 숯불에 살짝 구운 고기를 그녀의 입가에 디밀었다. 어떻게 받아먹어야 할지 몰라 멈칫했다. 젓가락으로 잡으려 했다. 싫다 했다. 수줍은 듯 받아 오물오물 씹는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술 한 잔 부어 건배를 외쳤다. 그녀의 목덜미는 붉게 물들어 얼굴로 타들어가 갔다. 시월은 사람도 붉게 물들게 하는가 보다. 그녀를 감상하는 사이 숯불은 열을 잃고 재를 남겼다. 떠나야 할 시간이다.  

 

그녀는 지금도 내 곁에 있다. 순수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내천자를 잘 그린다. 종처럼 부려먹는다고 짜증을 내기도 한다. 늦잠을 자는 그녀는 아침밥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도맡아 하라 한다. 김치 담는 것은 잊은 지 오래다. 나보다 아이들을 더 챙긴다. 돈에 환장이 들렸는지 월급날 조그만 늦게 송금해도 핸드폰이 불난다. 언제부턴가 안방보다 거실을 좋아 한다. 그래도 이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