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얘기

수험생을 둔 부모의 마음

말까시 2014. 10. 23. 11:09

 


◇ 핼쑥해진 지환이 힘내라... 

 

맑은 날이 많은 가을날, 산과 들은 온통 단풍들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갈대꽃이 휘날리는 물가에 오리들도 신났다. 억새가 나부끼는 언덕위에 사람들은 하얀 꽃 잡으며 포즈를 취해 보라한다. 황금들녘에는 벼를 수확하기 위한 콤바인이 부지런히 왔다간다. 새들도 날아와 나락을 쪼아 먹고 굴속에서 숨어 있던 서생원도 논바닥을 헤집고 다닌다. 풍성한 가을, 모두 다 즐거워 날뛰는데 냉기류가 흐르는 작은 방에는 핏기 없는 아들이 책과 씨름하고 있다. 

 

말을 붙이기도 어렵다. ‘파이팅’만 외칠 뿐이다. “대학에 대하여 엄마가 아는 것이 뭐있어 알아도 내가 더 아니까 가만히 내버려두세요.” 라고 말하는 아들은 새끼를 난 개처럼 예민하다. 밥 먹는 시간도 말이 없다. 무엇인가 말을 해보려 해도 어떻게 받아들일까. 묵묵히 식사에 집중할 뿐이다. 안달이 난 것은 아내다. 지나치게 관심을 갖다 보니 짜증이 난 것 같다. 잘 되라는 소리임에도 잔소리로 받아들이는 아들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문을 여닫는 소리 역시 소음으로 들리는 것 같다. 거실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조금만 커도 반쯤 열려 있던 문을 걸어 잠근다. 걸음을 걸을 때와 화장실을 들락날락 할 때 사뿐히 걸어야 한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공부하는데 방해가 된 것 같다. 절간처럼 조용한 우리 집 공기는 차갑고 흐름이 없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환기도 짧게 한다. 인생의 기로에 서있는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 상책인 것 같다.  

 

우리 때는 잘 먹어야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했다. 엄마는 온갖 것들을 사와 도시락을 만들어 날랐다. 학업의 문턱에 가보지 못한 엄마들은 반찬을 만드는 거 말고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매일 아침 청수를 떠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외치며 위안을 삼았다. ‘공부해라’ 이런 소리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자기방식에 조금만 벗어나도 잔소리따발총을 연발하는 도시의 엄마들과는 달랐다.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 죽는 그날까지 돌보는 시대는 지나갔다. 모진 시집살이를 하며 허리한번 펴보지 못하고 온종일 일에 몰두했던 엄마들은 자식 잘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뼈가 부서져라 학대했다. 결과가 무엇인가. 지 잘났다고 도외지에 나가 가끔 얼굴한번 내미는 것으로 할일 다한 것처럼 빈정대는 자식을 자랑하고 다니는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이제 살만하니 병이 와서 거동도 불편하고 이가 다 빠져 먹을 것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세상을 얼마나 한탄할까. 긴 한숨을 쉬며 삭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자식에게 바랄 것이 없다.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자급자족하는 것이 효도다. 늙어 힘없으면 스스로 가야 한다.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하는 요양원으로 말이다. 서러워 할 필요가 없다. 사람 냄새나는 요양원이 썰렁한 집안보다 백배 나을 것이다. 농경사회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살던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요양원이다. 노후 대책이 확실한 분들은 궁궐처럼 아늑한 요양원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아들아! 얼마 안 남았다. 마지막 온힘을 다해 후회 없는 고삼이기를 바란다. 산다는 것이 가시밭길투성이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갈림길이 지금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풀리기 시작하면 네 앞길 탄탄대로다. 조그만 참고 견디어 좋은 결실 맺기를 바란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니? 지켜보고만 있는 아빠도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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