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녘에 만난 그녀의 정체는? 찬바람이 불면서 감기란 놈이 내 몸을 강타했다. 근 한 달여를 괴롭힌 바이러스는 첫눈이 내리던 날 슬며시 떠났다. 침침했던 시력도 좋아졌다. 어깨에 힘이 돌았다. 그동안 오르지 못했던 산에도 올랐다. 수북이 쌓여 있는 눈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산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끔한 설경은 한 폭의 동양화였다. 냉각된 공기는 상큼했다. 잠겼던 목이 탁 트이면서 속이 시원하게 뚫렸다. 신체의 리듬이 정상으로 회복되자 살 것만 같다. 비가 내린다. 어둠속을 뚫고 내리는 빗물은 머리를 적시었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했다. 뛰어야 했다. 버스정류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가 보다. 버스가 달려왔다. 문이 열리자 잽싸게 올라탔다. 버스 안에는 초췌한 모습의 중년들이 새우잠을 청한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헝클어진 머리, 남루한 옷차림, 삶의 지친모습이 역력했다.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잠시 내렸다.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길가는 사람들의 윤곽이 뚜렷했다. 버스의 배차 간격이 길었다. 가방을 둘러맨 처자가 다가왔다. 얼굴에는 상처가 있었다. 아마도 술 한 잔하고 아스팔트에 갈아버린 것 같았다. 피딱지가 눌러 붙어 있는 자국이 오른쪽 뺨을 덮었다. 감추고 싶은 맘이 없었을까. 밴드라도 붙였으면 하는 생각이 앞선다. 그녀의 시선이 나의 눈과 마주쳤다. “아저씨!! 만원만 주세요.” 지체 없이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남루한 옷차림도 아니고 멀쩡하게 생긴 처자가 무슨 일로 만원을 달라고 했을까. 측은해 보이기도 했지만 천원도 아닌 만원을 달라는 것에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아저씨!! 제가 전화번호 적어 드릴 태니까 만 원만 꼭 빌려주십시오.” 반드시 갚겠다는 말을 반복하며 애원을 했다.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거절의 표시를 했다. 그제야 포기하고는 발길을 돌려 저만치 물러났다. 주변에 사람들이 제법 있었는데 왜 나에게 다가왔을까. 내 모습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을까. 남들이 보는 내 모습은 부드러운 모습이 아니다. 아내는 잔정이 없다며 늘 냉혈인간이라 한다. 몇몇 친구는 눈매가 매섭다며 쌍꺼풀 수술을 하라고 했었다. 이렇게 까칠한 놈에게 창피한 기색도 없이 돈을 달라고 한 그녀의 의중이 궁금했다. 매몰차게 돌려보낸 것이 마음에 걸렸다. 계속하여 머리가 복잡해졌다. 돈이 왜 필요했을까. 진정 한 푼도 없었을까. 자초지종을 물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았을 것인데, 거절하는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얼굴에 난 상처도 가리지 못하고 길거리로 나와야 했던 절박한 그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달려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처자는 떠나고 없었다. 요즘 사기꾼이 넘쳐 난다. 보이스피싱으로 돈을 날린 사람들의 뉴스가 종종 나온다. 판단력이 흐린 노인을 상대로 돈을 갈취하는 악덕상인도 많다. 믿음과 신뢰가 깨진 복잡한 사회, 모든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동정심에 꺼낸 돈이 검은 돈이 되어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이러한 세태가 내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 내내 마음이 무겁게 가라 앉아 있을 것 같다. 내 마음을 알아주듯 겨울비는 계속하여 내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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