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똥장군
비료가 없던 시절 거름으로 쓰였던 것이 인분이다. 소변역시 함부로 버렸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퇴비를 만드는 과정에서 인분이 첨가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거름이 아니라 했다. 냄새가 지독한 계분도 숙성을 거쳐 고급비료로 사용했다. 화학비료가 나오면서 쓸모없게 된 인분은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것을 운반하여 처리하기까지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든다. 인분을 밭에까지 운반하는데 쓰였던 것이 바로 똥장군이다.
똥장군은 옹기로 만들어 졌다. 나무로 만든 것도 있었지만 드물었다. 찰흙을 빚어 만들었기 때문에 무게가 상당하다. 장군을 짊어지고 밭에까지 운반하여 버리기까지 엄청난 무게를 이겨내야 한다. 옹기는 작은 충격에도 파손되기 쉽다. 특히 주둥이는 이빨 빠진 것처럼 잘도 떨어져 나갔다. 주둥이의 마게는 짚으로 만들어졌다. 견고하지 않으면 출렁이는 똥물이 넘쳐 흐르는 경우가 있다. 곰삭은 똥물이 살갗에 묻어버리면 비누로 세척해도 남새가 가시지 않는다. 똥독이 오르면 한동안 가려움증에 시달려야 한다. 이렇게 무거웠던 똥장군도 플라스틱이 나오면서 가벼워졌다.
화장실 역시 옹기를 묻어 인분을 받았다. 그래서 화장실을 똥독간이라 했다. 시멘트가 나오면서 용량이 작은 똥독은 사라졌다. 초기에는 시멘트로 만든 흄관을 묻어 사용했다. 나무로 틀을 만들어 흄관 위에 얹었다. 엉성하게 만들어진 나무판은 아래가 다보여 여간 무서운 것이 아니다. 잘못하다가는 빠질 수도 있다. 가끔 닭들이 빠져 허우적대기도 했다. 똥독이 오른 닭은 털이 빠지고 진물이 나서 죽기도 했다. 새롭게 등장한 것이 콘크리트로 만든 대형 화장실이다. 일 년 내내 한번만 치워도 가능한 거대한 똥독이 생긴 것이다. 이제 푸세식은 사라지고 정화조가 묻어져 똥차가 와서 뽑아 가면 그만이다.
인분은 오랫동안 숙성을 거치면 물처럼 변한다. 소변과 함께 잘 숙성된 인분은 밭으로 내가기전에 기다란 작대기로 저어주어야 한다. 뭉쳐 있던 인분이 잘게 부서지고 섞여 액비가 탄생하는 것이다. 액비는 배추나 무밭에 뿌려졌다. 무가 굵어지고 속이 꽉 찬 배추를 만드는데 인분만한 것이 없다. 농약이 없던 시절 배추와 무에는 인분과 함께 나온 기생충 알이 묻어 있었다. 세척이 덜된 야채를 그대로 먹었다가는 기생충에 감염되어 영양분을 다 빼앗긴다. 철따라 배변검사를 하여 구충제를 먹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아버지의 아버지 세대에는 마실을 가 놀다가 용변이 마려우면 집에 달려와서 볼일을 보았다고 한다. 그 만큼 거름이 귀했던 시절에 인분은 비료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시골에서 귀한 비료로 사용한 것과는 달리 도심에서는 비가 내리는 틈을 타서 몰래 버리는 경우가 언론에 비치곤 한다. 비용 절감을 위한 못된 행동으로 오염된 하천은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시궁창으로 변한다. 청개천을 복개한 이유도 오물을 감추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철거되어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되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 붐을 타고 전국의 하천들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옹기로 만든 똥장군을 시작으로 플라스틱운반용기가 나오고 다시 똥차가 나오기까지 우리의 아버지들은 인분을 대하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삐딱 밭까지 똥장군을 지고 가다가 똥물을 뒤집어써도 더럽고 재수 없는 똥이라 하지 않았다. 소중한 거름이 묻었다 여기고. 다시 긁어모아 골고루 뿌려 주었다. 그 덕에 남들보다 알찬 채소와 곡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식들을 배곯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그토록 어렵고 힘들었던 것이다.
|
'말까시의 추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논에 김매기 (0) | 2014.07.10 |
---|---|
보리타작 (0) | 2014.07.08 |
논두렁 (0) | 2014.07.03 |
호랑이 장가가는 날 (0) | 2014.06.24 |
검은 진주 오디 향에 취해 봅시다. (0) | 2014.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