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식사랑의 끝은 어디까지 일까.
빗방울이 내려 좋았는데 하늘이 연무로 가득하다. 좀 더 내렸더라면 움트기 시작한 새싹들에 원기를 주었을 것인데 못내 아쉽다. 들판에는 와글와글 산속에는 우둑우둑 만물이 소행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가지에 꽃이 피고 싹이 트면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 도심은 한바탕 소란을 피울 것이다. 남도에 벚꽃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루가 다르게 내달리는 벚꽃이 서울에 안착할 날도 머지않았다.
가랑비가 내리는 밤, 귀가를 서둘렀다. 안경에 부딪히는 빗방울은 시야를 흐리게 했다. 우산을 쓰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페달을 힘차게 밟아 속력을 냈다. 빗방울은 거세게 얼굴을 때렸다. 우비도 입지 않고 내달리는 자전거는 속력이 더할수록 눈이 따가웠다. 산성비가 눈 속으로 들어가 자극을 준 것이다. 봄비,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무도 없는 집은 썰렁했다. 옷깃에 묻어 있는 빗방울을 닦아냈다. 머리카락이 문제였다. 산성비에 약해진 머리가 우수수 빠지면 큰일이다. 그동안 빠지기 시작한 머리는 이마의 평수를 무지막지하게 넓혀 놓았다. 맑은 물로 헹구어 말렸다. 푸석한 머리에 영양을 공급하고 빗어 넘겼다. 부드러운 젤로 코팅을 하고 나니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떨거덕 거리는 소리에 놀란 딸내미가 나오면서 “어디가” 한다. 불이 꺼져 없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아무도 없을 때 전라로 화장실을 드나드는 습성이 있다.
배가 고파 사과를 우지직 부셔먹고 허기를 면했다. 좀 있으니 아내가 들어왔다. “얼큰한 김칫국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만 있는 것으로 해결하자고 한다. 피곤함을 입에 달고 사는 아내에게 더 이상 주문을 하지 않았다. 시골에서 올라온 물김치와 상치를 곁들여 저녁을 해결했다. 삼시세끼 중 가장 즐겁고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저녁이 아닌가. 식사를 끝내는데 채 십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홀대해도 되는 것일까.’ 아들놈이 있었더라면 푸성귀로 상차림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 맞고 올 아들을 생각하면 걱정이 된다며 마중을 나간다고 한다. “걱정도 팔자셔” 극구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늦은 밤 홀로 나선 아내는 아들과 함께 들어왔다.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은 아들을 생각해서 추어탕 한 그릇을 사 먹이고 왔다.”고 한다. 이런 젠장 나에게는 푸성귀를 잔뜩 먹이고는 추어탕을 사주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아들이 듣지 않도록 귓속말로 투정을 부렸다. 순간 도끼눈을 뜬 아내는 “자기하고 같나, 고삼인거 모르나, 공부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은데, 얼굴 홀쭉해진 거 안보여, 그리고 자기는 잘 먹고 다니잖아” 깨갱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아들사랑이 어디까지 일까. 가끔 딸내미가 불만을 토로 한다. 똑 같은 자식인데 표시 나게 편애를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소외감 느낄까봐 주문을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리 내리사랑이라 하지만 지나치리만큼 집착을 하는 것을 보면 얄밉기도 하다. 순간의 감정을 자제할 줄 모르는 것이 여자라고 했던가. 자식사랑 지극한 것에 토를 달 이유는 없지만 지나치게 표시나면 부작용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내버려 두어야 자립심이 생기지 않을까. 요즈음 아이들은 있는 밥도 차려먹지 않는다. 리모컨 인간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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