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새밭 아이들
안개 속을 달리는 차안에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기상을 한 아이들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차안에 몸을 실었다. 전날 주말 가까운 산에 가서 바람도 쇠일 겸 분위기 쇄신을 하자는 아빠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었다. 게임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들에게 무엇인가 변화를 주어야 했다. 목적이 부합되었는지 딸내미도 동참했다. 엄마는 직장일로 함께 하지 못했다. 안개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어 차는 느리게 서울을 빠져 나갔다.
구리 시계를 넘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유명산(마유산)’ 8부 능선인 ‘배너미고개’에 도착했다.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안개는 고갯마루에 오르자 보이지 않았다. 좁은 도로 양옆에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다리역할을 해준 차들이 즐비했다. 워낙 경사도가 급해 금방이라도 벼랑으로 굴러갈 것만 같았다. 불안을 느낀 아이들은 받침돌을 주워 바퀴에 밀어 넣었다.
워낙 이른 시간이라 산님들이 보이지 않았다. 산은 산책하기 좋은 길로 이어졌다. 오래전에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들어 놓은 길은 쉼 없이 걸을 수 있는 평단한 길이었다. 나무는 낙엽을 버리고 성장을 멈추었다. 산중이라 그런지 군데군데 얼음이 얼어 있었다. 이미 겨울은 산을 점령하고 말았던 것이다.
억새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산마루에 올라보니 구릉지마다 억새밭이 장관을 이루었다. 남한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는 운해가 되어 산중턱까지 덮어 버렸다. 처음 접하는 아이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높은 산은 운해를 뚫고 봉우리를 내밀었다. 이슬이 맺혀 있는 억새꽃은 빛을 반사했다. 눈부셨다. 자꾸만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운해에 넋이 나간 아이들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빠는 낄 틈이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인생은 험한 길, 공부는 고난 길,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분위기를 깰 수는 없었다. 모처럼 접한 멋진 풍광을 머릿속에 담도록 내버려 두어야 했다.
멋진 경치라도 배고프면 건성이 되기 마련이다. 평소 산을 좋아 하지 않았던 아이들에게 아침 산행은 녹록치 않았다. 억새가 우거진 구릉지에 영화 ‘관상’을 촬영한 세트장에서 과일을 먹었다. 그곳의 억새도 하얀 꽃을 흔들어 반겼다. 마루에서 중턱까지 이어진 억새의 흔들림은 출렁이는 융단이었다. 살포시 고개 숙인 색시처럼 끝없이 펼쳐진 억새밭은 아이들의 시선을 확실하게 사로잡았다.
과일을 먹었던 '관상' 촬영지 들마루
아들놈은 속았다고 했다. 길옆에 잠시 내려 억새구경하고 바로 맛집 탐험코자 나섰다는 것이다. 아들과 딸은 자꾸만 높아져 가는 상봉우리에 짜증을 냈다. 금방이란 단어를 반복해 사기꾼으로 몰리는 사이 정상을 점령했다. 산마루에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표지석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큰소리를 내어 야호는 할 수 없었지만 아이들은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외치고 있었다. 서울 근교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에 아들과 딸은 생각을 같이 했다.
하산 길은 빨랐다. 행글라이더 활공장에 이르자 마니아들이 이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들은 이륙하는 것을 보고 가자고 했다. 잠시 커다란 노송아래 멈추어 주변경관을 감상했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온 동호회 회원들도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바람의 방향이 맞지 않았는지 좀처럼 이륙하지 않았다. 비행 모습을 포기하고 하산을 재촉했다. 갑자기 발아래 뱀이 나타났다. 겨울잠을 자기 위해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뱀이다.” 라고 외쳤다. 마주 오던 아줌마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리가 뾰족한 것을 보니 독사였다. 잔뜩 독이 오른 가을 독사는 물리면 황천길로 직행한다. 숲속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정오를 넘었지만 산 아래는 아직도 안개가 자욱했다. 상경하는 내내 곤한 잠을 자고 있는 아이들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무엇을 얻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좋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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