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존경스러운 맹물파들이여!

말까시 2013. 1. 30. 14:32

 

 

◇ 존경스러운 맹물파들이여!

 

구름이 해를 가렸다. 잿빛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엇인가를 내리 부울 것만 같다. 맹위를 떨치던 한파도 물러갔다. 영상의 날씨가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게 했다. 거추장스러운 목도리도 풀어 장롱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입춘이 다가오고 있다. 매장의 진열장에 봄 상품이 하나둘씩 보이고 있다. 봄을 말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새해벽두부터 시작한 한파의 기세가 꺾인 것을 보면 봄은 우리 곁에 바짝 다가왔는지 모른다.

 

그날, 굵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늘지도 않은 겨울비가 창가를 때렸다. 겨울임에도 녹색을 유지하는 사철나무는 먼지를 씻어내어 선명했다. 작은 것이 뭉쳐져 떨어지기를 반복하자 매달린 잎이 춤을 추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잔가지는 빗방울을 조각내어 안개비를 만들어 날렸다. 길게 내린 빗방울은 그늘진 곳에 쌓여 있던 눈덩이를 말끔하게 녹여 없앴다. 염화칼슘에 끈적였던 도로도 검은색 아스팔트를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비오는 날이면  막걸리에 파전을 안주삼아 한잔 하고픈 생각이 굴뚝 같다. 축축하게 가라앉은 기분, 창밖에는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싱숭생숭 가슴팍을 파고든다. 오후가 되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시선은 자꾸만 창가로 쏠린다. 퇴근이 임박해지자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횟수가 잦아진다. 연초부터 술을 멀리 했지만 머릿속에는 술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 차 있다.

 

호출이 왔다. 소한마리를 잡았는데 특수부위를 먹으로 오란다. 군침이 돌았다. 불러줄 때 달려가지 않으면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그래 안주만 먹자’ 땡 하기가 무섭게 달려갔다. 붉은 빛이 선명한 소고기가 눈앞에 들어왔다. 노릇노릇 숯불에 구워먹을 것을 생각하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생고기란다. 참기름에 찍어 입안에 넣었다. 부드러운 살코기는 한 번의 씹음에 사르르 녹았다. 술을 따라준다. 의사선생님으로부터 경고장을 받았다고 극구 사양했다. 주당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내의사와는 상관없이 밀어붙이는 공격에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령껏 기교를 부려 마시는 횟수를 줄였다. 이미 거하게 취한 주당들은 한말 또 하고 반복을 거듭했다. 주사에 짜증이 났지만 추임새를 넣어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노래방에 갔다. 마이크를 잡자마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좁은 공간은 청소가 미흡했는지 매캐한 냄새가 난다. 술에 정복당한 주당들은 공기의 좋고 나쁨을 구별할 수가 없다. 안주역시 손으로 집어먹는다. 위생개념은 제로에 가깝다. 흔들어 먼지를 털고, 마시고 토하고, 고추장을 얼굴에 발라 흡혈귀 모습을 하고 즐거워한다. 난 취기가 없어 흥이 나지 않았다. 억지춘향으로 불려나가 노래를 한곡 했다. 숨이 턱까지 밀려왔다. 이제껏 노래한곡하고 이렇게 숨이 찬적이 없었다. 그 동안 술기운에 힘든지 모르고 날뛰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흥미는 없고 노는 것 자체가 지겨웠다. 끝났는가 싶어 옷을 입고 가려 하면 추가시간 보너스가 더해진다.

 

맹물파들은 모른다. 그들은 늘 맨 정신으로 술자리와 노래방에 익숙하여 나름대로 즐겁게 노는 방법을 터득했지만, 주당이 갑자기 술을 마시지 않고 논다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가장 어렵게 했던 것은 체력이다. 장시간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문이 아닐 수 없다. 노래방 역시 노래가 거듭되고 반주에 춤을 추다보면 체력이 금방 바닥나서 주저앉기 바쁘다. 평소와 다르다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다. 어찌한단 말인가. 술을 마시지 않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좋은 방책이 없단 말인가. 맹파들이여! 한수 배워봅시다.

 

'세상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CD딸내미, 골판지 마누라  (0) 2013.07.10
명절증후군 전조증상  (0) 2013.02.06
'망구'란 말에 맨붕이 된 아내  (0) 2013.01.21
공포의 관절꺾기  (0) 2012.12.24
공포의 나일론 양말  (0) 2012.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