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포의 나일론 양말
강추위에 눈까지 내려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많다. 해가 쨍하고 내리쬐어도 열기는 피부에 닿지 않는다. 내린 눈이 길바닥에 달라붙어 반질반질 미끄럽다. 꽈당 하고 넘어질까 봐 살금살금 걷는 발걸음이 위태로워 보인다. 여인의 목을 타고 둘둘 말아 올린 목도리는 얼굴을 감추고 눈만 들어 내놓았다. 달리는 차 꽁무니에서는 연신 하얀 수증기를 내뿜어 흩어진다. 연일 계속되는 영하의 날씨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에 난타를 가하여 움직임을 더디게 하고 있다.
소싯적 모든 것이 부족하고 추위는 매섭고 외풍이 거세어 겨울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솜이불 하나에 의지하여 온가족이 안방에서 자다보면 구들장의 열기가 식어가는 새벽이 되면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발이 시리어 양말은 신은채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캐시밀론 이불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불도 귀한 존재였다. 아침밥을 짓기 위하여 아궁이 불이 들어가면 구들장이 서서히 뜨거워져 새벽에 곤한 잠에 빠지곤 했다. 밥상이 들어와야 이불속에서 쏘옥 빠져나와 눈을 비비고 밥을 먹었다. “어제 새로 사온 양말에 구멍이 나다니 어찌된 일이냐” 엄마는 양말을 뚫고 나온 발가락을 보고는 다그쳤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겨울, 산도 얼고 논에 물도 언다. 판판하게 얼어붙은 얼음은 놀이터로서 손색이 없다. 팽이도 치고 썰매를 타는 즐거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썰매는 손수 만들어 타곤 했었다. 부잣집 아이들은 읍내에서 칼날을 사다 썰매를 만들어 자랑했다. 철사로 만든 썰매보다 달리는 속도가 남달랐고 잘 미끄러지지도 않아 부러움을 샀다. 아침에 꽁꽁 얼어붙어 있던 얼음이 오후가 되면 가장자리가 녹아내려 약해진다. 그것도 모르고 썰매를 타고 달리다 보면 풍덩 빠져 양말을 적시고 만다. 집에 그대로 신고 갔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논둑에 불을 놓아 말려야 했다.
썰매타고 질리면 불장난을 하는 것이 아이들의 놀이문화였다. 성냥을 꺼내 불을 만들어 바싹 말라 있는 잡초에 갔다대면 불길이 금방 솟아오른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옆으로 번지는 속도가 아주 빨라 장관을 이룬다. 더러워진 양말을 물에 씻어 불길에 갔다 대면 김이 모락모락 나며 마른다. 불길 따라 옮겨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구멍이 나는 수가 있다. 나일론 양말은 질기고 튼실한 반면 불에 약한 것이 흠이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순간의 실수로 구멍이 나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엄마한테 혼날 것을 생각하니 겁이 덜컹 났다.
엄마는 누가 양말이 몇 켤레이고 구멍 나서 꿰맨 양말이 어떤 건지 죄다 기억하고 있다. 구멍 난 순간부터 공포의 연속이다. 노는 것도 싫어지고 집에 가는 것도 망설여진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혼쭐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 기술이 없어 바늘로 꿰맬 수도 없다. 물질이 귀했던 시절 양말 한 짝이라도 귀한 존재인데 엊그제 사온 새 양말을 구멍을 냈으니 고무신으로 등짝을 맞는 것은 당연지사다. 기술 좋은 엄마가 꿰맨다 해도 불에 달라붙어 구멍이 난 양말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아침밥 먹다 들켜버린 구멍 난 양말로 호되게 혼나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도망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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