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은 풍년인데 입은 흉년이다”
즐거운 설 명절은 먼동이 트면서 시작되어 차례를 지내고 덕담을 주고받으며 떡국을 비움으로써 절정에 오른다. 웃어른을 찾아뵈어 세배를 드리고 성묘를 다녀오면 해는 어느새 뉘엿뉘엿 서산마루에 걸쳐있다.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새해 다짐을 하고나면 곧이어 어둠이 밀려오면서 설 명절은 사실상 끝난다. 폭설로 인하여 고향 가는 길이 고행길이 되었다는 뉴스에 왠지 서울에 있는 나는 죄를 지은 것 같다. 힘들어도 설 명절은 고향에서 보내야 제 맛인데 언제 부턴가 엄마가 상경하여 서울에서 차례를 지내게 되었다. 사방이 꽉 막힌 아파트에서의 명절은 소란스럽기만 했지 운치가 없다. 좁은 공간에서 많은 식구들이 같이 있다 보니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명절분위기는 이런 것이 아닌데, 세상이 변하여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옛날이 그리웠다. 엄마는 아침 여덟시에 나와 버스를 타고 읍에 도착하여 미리 예약해놓은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한 시간을 기다리고 두 시간을 더 기다린 끝에 차를 탈수가 있었다고 했다. 서울에 안착하자마자 이젠 힘에 부쳐 이 짓도 못하겠다고 한다. 기력이 없다하면서도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보니 배추, 무수, 고무마순, 한과를 비롯하여 셀 수 없이 많았다. 손수 가꾸어 만들어 낸 먹을거리는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 하면서 아들형제 똑 같이 나누어 주었다. 밥 한 톨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차례가 끝나고 차려진 밥상을 보니 평소 보지 못한 음식들로 가득했다. 온가족이 둘러 앉아 맛있게 먹었지만 엄마는 밥이 줄지 않았다. 왜 이리 못 드시냐고 했더니 이가 다 망가져 씹을 수가 없다고 한다. 오물오물 먹다보니 식사시간은 남들보다 두 배는 더 걸린다고 했다. 자식들의 안녕을 위하여 당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쉴 틈 없이 노동에만 전념한 결과물이다. 인플란트를 하면 좋으련만 연세가 많아 시술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자식 된 도리로서 불효막심하다. 온 가족이 아침식사를 마치고 난 후 한참을 지난 후에 엄마는 식사를 끝마쳤다. 물 한 모금을 드시고 나서 “눈은 풍년인데 입은 흉년이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참 좋은 세상에 먹을 것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유치고는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아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가 좋을 때는 먹을 것이 없어 못 먹었고 이제 먹을 것은 풍부하나 이가 망가져 먹을 수 없는 기구한 운명 앞에서 체념한 듯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이 좋을 때 많이 먹어라” 하면서 가져온 한과를 손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엄마는 하루 더 있다가 가라고 하는 것을 뿌리치고 큰집을 나왔다. 차 조심하라 하면서 아파트 마당까지 나와 배웅을 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인형처럼 작아진 몸매는 좌우균형이 흐트러져 있었다. 세월이 짓밟고 간 흔적이 여기저기 또렷하게 나타났다. 시동을 걸어 출발하고 나서 후사 경을 보니 엄마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아들과 손자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서있는 것이다.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 것이 아들의 도리인데 알면서도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럽다. 틀니를 다시 손본다고 하는데 잘되어 고기반찬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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