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언제 부턴가 10월의 마지막 밤을 성탄절 못지않게 보내려는 연인들이 늘어났다. 유행가 노랫말이 곡에 실려 스피커를 타고 나온 이후부터 벌어지는 현상이다. 국경일에 얽힌 이야기는 몰라도 이용의 ‘잊혀진 계절’은 누구나 한 번씩 흥얼거릴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이루지 못한 꿈이 계절의 끝 무렵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듣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낙엽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잊혀진 계절의 가사가 입가에서 맴돈다.
그녀의 긴 머리는 유난히 빛났다. 석양이 물들 무렵 나타난 그녀는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하얀 목덜미를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빠져 나갔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자 변두리 임에도 불구하고 차량이 많았다. 가는 길옆에 저수지가 있었다. 저수지 제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억새가 하얀 꽃을 피워 바람에 흔들렸다. 억새꽃 하나를 꺾어 그녀에게 주었다. 살며시 미소 지며 받아 들은 그녀는 가슴팍에 꽂아 어떠냐며 즐거워했다.
저수지 수면위로 무수히 많은 불빛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움직이는 불빛을 따라 제방을 걸었다. 저수지 주변의 건물에서 내뿜는 불빛은 하나둘 수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일렁이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수면은 불빛을 춤추게 했다. 어느 샌가 손과 손이 맞닿은 곳에는 땀이 고였다. 걷다 보니 배가 고팠다. 의견을 물을 필요도 없이 둘은 과수원에 다다랐다. 가장자리에 아담한 건물이 있었다. 그 안에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추위에 강한 사람들은 과수원 곳곳에 만들어 놓은 들마루에서 화롯불에 고기를 구워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밤공기가 찼다. 이슬이 내리기 시작했다. 풀잎에 이슬이 맺혀 구두를 적시었다. 지붕이 있는 방갈로에 자리를 잡았다. 풀벌레소리도 들렸다. 건너편 도로에서 내달리는 차량소음으로 적막감은 깨졌지만 미세하나마 풀벌레 소리는 시골 깊숙이 들어와 있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고기 굽는 냄새는 구수했지만 속을 쓰리게 했다. 그녀 역시 시장기를 느꼈는지 입맛을 다셨다. 가슴팍에 꽂혀 있는 억새꽃은 불빛에 빛났다.
연변약산에 진달래 아줌마가 다가왔다. 특이한 억양으로 말을 건네는 아줌마는 일에 지친 듯 표정이 없었다. 주문을 받고는 쏜살 같이 주방으로 달려갔다. 배고픔과 갈증을 해결하고자 컵에 있는 물을 한숨에 들이켰다. 그녀 역시 목이 탔는지 일순간에 비웠다. 빈 물 컵에 다시 물이 채워졌다. 노랗게 빛나는 전등에 하루살이가 날아들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벌레를 내 쫒고자 손사래를 치는 그녀의 동작에 가슴뛰는 시간이 길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녀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어 가방에 넣었다. 가늘게 뻗은 목덜미는 여전히 희고 고왔다. 그녀를 감상하는 것이 고기를 구워 먹는 것보다 더 좋았다. 숯불에 살짝 구워 그녀에게 디밀었다. 어떻게 받아먹어야 할지 몰라 멈칫했다. 젓가락으로 잡으려 했다. 싫다 했다. 그녀의 입술에 대주었다. 수줍은 듯 받아 오물오물 씹는 그녀는 육즙을 음미하는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알코올 한잔을 권했다. 흔쾌히 마셨다. 목덜미에서부터 붉게 물들어 올라갔다. 10월은 나무만을 붉게 물들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감성이 불같이 되살아 난 그녀는 방갈로 안을 훈훈하게 데웠다. 마음은 이미 사나이 가슴팍을 뚫고 들어가 있는지도 모른다. 숯불은 열을 잃고 재를 남겼다. 떠나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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