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축구가 만들어 낸 아내의 미소
매일 두게임씩 하는 브라질 월드컵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날씨도 덥고 해서 거실에서 자는 경우가 많다. 축구 본다고 부산을 떨다보면 다른 사람의 숙면에 방해가 된다. 가급적 가족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볼륨도 최대로 낮추고 전등도 켜지 않는다. 새벽 한시부터 시작되는 빅게임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청소차의 둔탁한 소리에 아침이 왔다는 것을 짐작하고 출근 준비를 한다.
축구 본다고 집안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불만인 아내는 잔소리가 많다. 요즈음 월드컵시즌이라 퇴근 후에는 곧장 집에 와서 주요 골 장면을 보고 경기결과와 함께 내일 있을 경기에 대하여 꼼꼼히 살핀다. 축구에만 몰두 하다 보니 아이들이 어질러 놓은 주방에 관심을 둘 겨를이 없다. 아내가 늦게 오면 설거지라도 해 놓아야 하는데 깜박 잊을 때도 있다. 손에 물을 묻혀 기름기 있는 그릇을 닦는 것은 정말 싫다. 시대가 변해서 남자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의 등살에 못 이겨 시늉은 내지만 불만이 많다. 지하에 계시는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벌덕일어나 노발대발 할 것이다.
언론매체에서 더 부추기는 것 같다. 드라마에서도 남자의 나약한 모습이 종종 보인다. 부엌에서 칼질하는 모습은 부지기수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 할 수 없는 일, 나름대로 배우고 익혀 특별음식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주기도 한다. 예전에는 밥솥에 밥만 앉혀놓아도 잘 하는 일이라 했는데, 이제 그것 갖고는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없다. 찌게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김치 또한 척척 담아내야 한다. 그뿐만 아니다. 설거지를 함에 있어 보드득 소리가 나야 하고 바닥에 물 한 방울 없이 뽀송해야 한다.
오늘 아침 거실에서 조용히 축구를 보고 있는데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가족들을 볼 수 있었다. 어두운 거실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직행하는 가족들의 걸음 거리는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볼일을 보고 급히 방으로 들어가는 아이들은 축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취미도 가지가지라고 하지만 4년에 한번 있는 월드컵에 저렇게 무관심 할 수가 있을까. 새벽에 이루어지다보니 잠과의 싸움에서 이 길수 없는 것이 아이들이다. 이해 할만하다.
축구는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거의 육탄전을 방불케 했다.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부엌에 들어가 보니 그릇들이 반짝 반짝 빛이 났다. 엊저녁 아내는 회식이 있다고 느지막이 귀가 했다. 간만에 세제를 풀고 거품을 내어 제대로 설거지를 했던 것이다. 나는 5분이면 아무리 많은 그릇이라도 끝낼 수 있다. 아내는 대충한다고 늘 불만이다. 건강에도 좋지 않고 환경에도 문제가 많은 세제를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어제는 시간을 좀 더 할애하고 세제를 풀어 수세미로 박박 닦아낸 결과이다.
밥솥을 열어보니 밥이 하나도 없었다. 쌀통에서 쌀을 꺼내 물에 살짝 불린 다음 솥에 넣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밥이 잘되도록 아주 느린 취사선택을 했다. 요즈음 밥솥은 제주가 출중했다. 네비게이션 아줌마가 밥솥 안에서도 숨어 있었다. “맛있는 밥이 완성되었습니다. 잠시 후 수증기가 발생하오니 조심하여 주십시오.” 라고 정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 그 소리를 듣고 나온 아내는 “설거지도 잘하고 밥까지 웬일이셔.” 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출근 준비를 끝마친 나는 쥬슈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나왔다. 보기 드문 아침풍경에 감동을 먹은 아내는 “오래살고 봐야겠다.”면서 미소를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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