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미널 다방
벚꽃 필 때 만나서 아카시아 꽃향기 사라질 즘 그녀는 떠났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름도 특이하고 엷은 하늘색 머플러가 인상 깊었던 그녀는 청순한 이미지로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다. 찬바람이 물러가고 봄꽃이 필 무렵이면 어김없이 기어 나와 근질근질 쓴 웃음을 짓게 한다. 봄바람이 불고 꽃비가 내리면 술 한 잔과 함께 생각나는 그녀는 여름장마가 오기 전까지 나를 괴롭혔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본가에서 급히 내려오라는 전갈이 왔다. 나이가 서른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장가를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불안을 느낀 엄마는 참한 아가씨가 있다고 선을 보라했다. 형과 누나는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이미 결혼을 하여 막내인 나를 안쓰럽게 여긴 엄마는 색시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그렇게 재촉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터미널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며 전화를 끊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두어 시간 가다가 내리면 터미널다방이 나온다. 그녀의 인상은 어떻게 생겼을까. 나이는 얼마나 먹었을까. 아무것도 모른 채 선을 보러 가는 나는 답답했다. 참하고 예쁘고 집안 좋다는 중매쟁이 말만 들었을 뿐 아는 것이 없다는 엄마는 일단 만나 보라 했다. 중매인은 엄마의 친구다. 그분은 나를 모른다. 단지 엄마의 말을 듣고 중매를 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골똘히 생각하다보니 머리가 지근지근 아파왔다.
고속버스는 막힘없이 달려 터미널다방에 내려 주었다. 이층에 있는 다방을 가고자 계단에 오르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난생처음 선보는 것에 무척이나 긴장한 것이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시선은 어디에 둘 것인가. 차는 무엇을 마셔야 하는가. 이제껏 어디에서도 학습한바 없다. 난간을 잡고 간신히 올라갔다. 긴장한 나머지 방광은 부풀어 올라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배설의 기쁨을 만끽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방 안은 담배연기가 자욱하여 어두웠다. 희미한 불빛 아래 조용필의《창밖의 여자》가 무겁게 깔리고 있었다. 구석진 자리에 엄마와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이었다. 엽차를 마시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누나는 이것저것 주문을 하면서 절대 떨지 말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나누라 했다. 주문한다고 마음대로 된다면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 누나의 소리는 귀전에 와 닿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의 옆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었다.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키가 크고 늘씬 했다. 외면상으로는 합격이다. 중매인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마실 것을 물어보지도 않고 커피를 주문했다. 대략적인 질문과 답이 이어지고 침묵이 흐르자 중매인은 자리를 비우자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옆 테이블에서 지켜보겠다고 한다. ‘이럴 수가’ 당황하는 나를 본 중매인은 그녀의 부모를 끌고 나갔다.
그녀와 대화가 시작되었다. 고향이 같아서인지 대화는 화기애애했다. 처음에 긴장했던 기분은 시간이 흐르면서 누그러졌다. 그녀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부끄럼 없이 질문에 성의 것 답변하는 그녀는 미소를 띠었다. 한참을 이야기 하다 보니 가로등에 불이 들어 왔다. 저녁을 먹어야 했다. 처음 만나 수저와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는 좀 그러했다. 과감하게 맥주 집으로 안내했다.
한잔 두잔 석 잔이 넉 잔이 되어 마시다 보니 어느새 연인이 된 것처럼 가까워졌다. 주당과 주당이 만난 것이었다. 대화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그녀역시 막내였다. 곱게 자란 듯 성격도 좋았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예매한 고속버스는 이미 끊어지고 없었다. 기차를 타야 했다. 역까지 걸었다. 손을 잡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보니 역이 저만치 있었다. 막차였다. 빨리 타야만 했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열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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