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침 맞은 전복 회
찬란했던 꽃들이 지고 열매가 맺었다. 아직 콩알만 해서 볼품없지만 무럭무럭 자라다 보면 사람머리만큼이나 큰 것도 있을 것이다. 나무에 물이 오르면서 커져버린 나뭇잎은 빛을 가려 그늘을 만들었다. 먼발치서 피어오른 아지랑이 가득한 들판에는 무수한 생명들의 소리가 요란스럽다. 꽃 피는 봄이 엊그제였는데 녹음이 우거지는 여름이 목전에 와 있다. 산천은 싹이 돋아 숲이 되었다. 숲은 공기를 정화하여 바람을 만들고 사람은 바람 따라 숲으로 간다.
퇴근 무렵 카톡이 날아 왔다. 전복을 주문했으니 빨리 오라는 내용이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반가운 소식에 엔도르핀이 팍팍 솟았다.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빠르게 굴러갔다. 어떻게 요리를 할까. 크기는 얼마나 될까. 데쳐서 먹을까. 아니면 산채로 회쳐서 먹을까.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전복은 기름장에 찍어 먹으면 오독오독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입안에 가득한 침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페달을 밟아 쌩쌩 달리는 자전거는 평소보다 속도가 빨랐다. 저녁시간이 다가와 허기진 배는 무엇을 달라 꼬르륵 했지만 힘이 부치지는 않았다. 기대감에 솟아난 힘은 하늘 높이 날게 했다. 마음은 이미 집에 도착해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내가 환한 얼굴로 맞이했다. 일단 아이스박스를 뜯어 밀봉된 비닐봉지를 열어 보았다. 작은 것이었지만 양은 충분했다. 손질을 해야만 했다. 과도를 날카롭게 갈아 날을 세웠다. 전복을 손에 쥐고 칼을 깊숙이 찔러 살점을 발라냈다. 워낙 작은 전복이었기에 발라내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맑은 물에 세척을 한 다음 물기를 제거하고 얇게 썰어 냈다.
날것에 익숙한 아이들은 서투른 젓가락질로 맛있게 먹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참기름으로 만든 기름장은 전복 맛을 한층 더해주었다. 회를 별로 좋아 하지 않는 아내도 오도독 씹히는 맛이 좋다며 잘도 먹었다. 날것과 술은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책장위에는 잘 숙성된 칡술과 뽕나무술, 포도주가 있다. 전복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술이 무엇일까. 평소 마셨던 술 향을 더듬어 보았다. 약간 떫은맛과 단맛을 내는 칡술, 은은한 향이 일품인 뽕술, 달콤함이 입 안 가득 퍼지는 포도주, 위장에 좋다는 칡술을 선택했다.
다음날 저녁 남은 전복을 끓는 물에 데쳐서 미나리와 버무려 무침을 했다. 미나리 특유의 향과 부드러운 전복의 만남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저절로 행복해지는 입안은 봄기운이 춤을 추웠다. 매콤함과 새콤함이 어우러져 달콤함이 배어나온 무침은 아이들도 무척 좋아 했다.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운 아이들은 더 달라 했다. 오늘도 한 잔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도주를 선택했다.
온가족이 잘 먹고 흐뭇해하는 모습을 본 아내는 다음에도 급작스런 이벤트를 준비한다고 하며 흡족해 했다.
주당들은 예측하지 못한 술자리가 마련되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에 빠진다. 소통이 되는 사람과의 술좌석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즉흥적 만남은 이야기꽃이 멈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소보다 두 배는 마신다. 적당한 취기는 근심걱정을 잊게 하고 잠시나마 무한한 행복감을 느낄 수가 있다. 이 얼마나 좋은 만남인가. 바로 이것이 사는 재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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