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백색 보석이 내려앉은 관악산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집을 나서는 동안 보이는 것은 인근 아파트 외벽이 전부였다. 일요일 아침 지하철은 넉넉했다.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녀들도 보였다. 시내로 접어들수록 내리고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편안하게 앉아 잠을 청했다. 지하철 소음으로 눈만 지그시 감은 채 상념에 빠져 들었다. 한강을 지날 때 잠시 바깥을 엿볼 수 있었다. 아직도 안개는 자욱했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웠다. 갈아타기를 두 번하여 낙성대역에 도착했다.
만남의 광장에는 산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누가 누군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나를 누군가 낚아챘다. 남성분들만이 눈에 띄었다. 자리를 잡고 기다림이 이어졌다.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는 소리는 정겨웠다. 가끔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대는 여인들이 소란스러웠다. 안방인양 질러대는 웃음소리는 고막을 후려쳤다. 잠시 후 아리따운 여인들이 나타났다. 손을 맞잡고 반가운 인사를 나눈 다음 묵직한 배낭을 메고 자리를 떴다.
마을버스를 타고 관악산을 향했다. 버스 안에는 학생보다 관악산을 오르려는 산사람들이 더 많았다. 서울대학교를 가로 질러 등산로 바로 아래 정류장에서 내렸다. 서울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등산로에 접어들자 내린 눈이 그대로였다. 날씨가 추워 눈은 얼지 않고 푸석푸석 겉돌았다. 양지바른 곳에서는 녹았다 얼어 빙판인 곳도 있었다. 아이젠을 차고 조심조심 올랐다. 바람 한 점 없이 포근한 날, 높이 오를수록 설경은 넓고 길었다.
겉옷을 벗고 속도를 냈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입김이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걸음이 더해질수록 선두와 후미는 멀어졌다. 대장님의 리드와 중간과 후미의 안전책임자를 배치하여 순조롭게 올랐다. ‘연주대’를 가리키는 고갯마루에서 막걸리를 나누어 마셨다. 적당하게 말라 살짝 비틀어진 샛노란 곶감은 막걸리 안주로 최고였다.
‘연주암’ 위의 헬기장은 노천식당이었다.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불을 피워 먹거리를 만들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어묵향이 허기진 배를 자극했다. 흘러나온 침은 입 안 가득 금방이라도 흘릴 것만 같았다. 후물거리는 어묵과 국물을 먹으려고 아우성이었다. 뜨거운 국물이 오장육부를 휘돌아 배를 일으켜 세우자 추위는 온데간데없었다. 막걸리와 소주를 나누어 마시고 방울토마토, 부침개, 나물, 계란, 김장김치를 곁들여 점심을 아주 맛깔스럽게 먹었다.
정상은 복잡했다. 사방팔방 펼쳐진 아름다운 모습에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소나무는 작았다. 매서운 칼바람에도 생명을 이어가는 작은 나무들의 떨림은 가냘 펐다. 해가 비치는 바위틈에 눈이 녹아 물이 맺혔다. 검은 이끼에 물이 들자 촉촉이 적셔 생기가 돌았다. 까마귀는 낮게 날아 까악! 까악! 소리를 내렸다.
‘연주대’에서 인증 샷을 하고 본격적인 하산 길에 접어들었다. 초입부터 절벽이 눈앞에 있었다. 미끄러져 떨어지기라도 하면 바로 죽음이었다. 눈이 쌓인 암벽을 타고 한발 움직일 때마다 무서움이 엄습했다. 공포에 질린 여인은 원망의 소리를 퍼부었다. 그 소리는 길고 짧았다가 자지러졌다. 밧줄을 붙잡고 조금씩 전진했다. 장난기 어린 남정네의 손놀림에 눈은 하늘로 올랐다. 여인의 목덜미로 날아들었다. 차가움에 놀란 여인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앙갚음이라도 하듯 여인도 맞장구쳤다. 웃고 즐기는 동안 서울대 지붕이 보였다. 하산의 끝자락에서 간단하게 몸을 풀고 오던 길을 향해 걸었다. 종일 스릴과 공포가 엄습했지만 눈 덮인 설경은 보기 드문 풍광이었다. 모처럼 겨울산행 더 없이 즐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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