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과 부모의 중간에 있는 우리는 어버이날을 즐겨야 하나 베풀어야 하나
급경사 옹벽에 넝쿨식물이 무성하게 자라 회색빛콘크리트를 감추어 버렸다. 뿌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없는 벽을 타고 넝쿨은 상단까지 무척이나 빨리 올라갔다. 가느다란 줄기에 무수히 많은 초록의 잎들이 합쳐져 시원한 병풍을 만들어 놓았다. 태양빛이 들어 비추면 흔들리는 이파리들은 광채를 내뿜어 보기 좋았다. 살며시 다가온 강바람에 너울을 만들어 버린 잎들은 바람길 따라 춤을 추었다. 도시의 하천은 지난봄에 속옷을 입고 초여름에 들어서자 푸른색 외투를 걸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변했다. 아침밥상머리에 아무 말도 없다. ‘오늘이 어버이날인데 즐거운 하루 보내십시오.’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들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는데 실망이다. 입시에 열중하는 그 모습이 보기는 좋지만 특별한 날은 빈말이라도 한마디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야간자습 한다고 밤늦게 오는 아이들에게 저녁을 기대하는 것은 오산인 것 같다. 아내와 둘이 자축이라도 해야겠다.
머리가 커지면서 자기 일에만 몰두 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갸우뚱 해진다. 학교에서도 오직 공부만을 위한 교육에 치중하고 도덕과 윤리에는 등한시 한 것 같다. 초․중등 시절에 아이들은 어버이날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학교에서 손수 만들어 온 종이꽃을 달아주곤 했었다. 자그마한 선물도 준비하여 아내와 나를 기쁘게 한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무척이나 바쁜 아이들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깡그리 잊은 것 같다.
어제 저녁 홀로계신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아들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듯 벨이 한번 울리자마자 바로 받았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밝았다. 아마도 누나나 형님이 전화를 먼저 한 것 같다. 내가 말할 기회도 없이 계속하여 아내 그리고 아이들의 안부를 물었다. 이 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발음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기억만큼은 예전 그대로 총명했다. 전화할 때마다 안녕을 묻는 엄마는 늘 도시에서 사는 자식들 걱정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 같다.
“너희만 잘 살면 그만이다. 끼니 거르지 말고 밥 잘 챙겨먹고 건강해라.” 엄마는 아직도 밥을 굶지 않나 늘 걱정을 하신다. 배고픈 시절의 뼈아픈 기억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냉장고에 있는 오래된 음식은 드시지 말라 해도 해도 요지부동이다. 소중한 음식을 함부로 버리면 천벌을 받는다는 옛말을 맹신하고 있는 것 같다. 진실이 왜곡되었다 해도 어릴 적 배우고 익힌 사실들을 한순간에 부정하기는 우리도 쉽지 않다.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안부전화 했다가 오히려 나의 안위만을 답하고 만 격이 되었다.
저 멀리 처갓집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 장인어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워낙 말이 없는 장인어른은 내가 묻는 안부에 대하여 답변을 할뿐 별 말이 없었다. 좀 어색한 분위기를 이어가다가 “모처럼 어버이날이고 하니 하루 푹 쉬면서 즐거운 하루 보내십시오.” 끝말인사를 하고 끊었다. 한창 농번기라 그런지 장인의 목소리에서 바쁜 기색이 역력했다. 장인과 장모는 아직 젊다. 가까이 사는 처제와 처남이 있어 그렇게 외롭지는 않다. 손수 농사지은 푸성귀로 반찬을 만들어 전국에 사는 처제들에게 택배로 날려 보낸다. 농사지어 반찬을 만드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늘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일 년 중 우리가 챙겨야 할 일들이 많다. 새해가 되면 달력에다가 중요한 날을 표시해둔다. 표시를 하다가 보면 참으로 챙겨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살다보면 예측하지 못한 일들도 많다. 조금만 소홀히 해도 그냥 지나치는 수가 있다. 미안하고 정말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볼일이 없다면 다행이지만 살다보면 언제 어느 곳에서 다시 마주칠지 모르는 일이다.
지난 주말에 보모님 용안을 뵈러 많이들 다녀왔을 것이다. 한번 다녀오려면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시간도 많이 빼앗긴다. 하지만 그만큼 마음은 편안하고 즐겁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계절이 바뀌면 꼭 찾아뵈어 안녕을 묻는 것이 자식 된 도리가 아닌가 한다. 애경사를 비롯하여 부모님과 아이들 생일 등 집안대소사를 소홀히 했다가는 그 원망이 평생 가는 수가 있다. 아무리 바빠도 꼭 챙겨야 할 것들은 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소중이 여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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