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름 속에 숨어버린 예봉산(禮峯山)
역시 비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밤새 아스팔트를 움푹 파일정도로 장대비가 내렸다. 주말이면 의례적으로 내리는 비에 익숙하여 대수로울 것이 없었다. 집을 나썰 때는 가랑비로 바뀌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 내내 배낭을 멘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오르는 사람마다 시선은 나를 향했다. 호우특보가 내렸다는 아침 뉴스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등산을 포기 한 것 같다. 승객들은 산이 무엇이기애 이비를 맞고 등산을 가려하는지 의아한 듯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회기역은 중앙선 전철공사가 완공되면서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하였다. 1호선과 중앙선의 환승역으로 동북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아주 중요한 역이 되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다. 그 바쁜 와중에 거울을 보며 흐트러짐을 고치는 아가씨의 다리는 뭉텅했다. 총알처럼 튀어가는 젊은이에 비해 출구가 어디인지 잘 몰라 물어보는 노인 내외가 왠지 측은했다. 넓은 대합실에 멈추어 담소를 나누고 있는 일행은 우리밖에 없었다. 비는 계속하여 회기역 레일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버스안과 달리 전철 내에는 듬성듬성 등산복차림의 산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즐거운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지난밤 내린 비는 중랑천의 고수부지를 넘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무섭지도 않은가 강가에는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불어난 강물을 무척이나 신기한 듯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차안에는 냉방기가 가동되어 피부의 끈적임을 용납하지 않았다. 한강줄기를 거슬러 올라 달린 전철은 팔당역에 우리 일행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구름은 예봉산 정상을 향하여 느리게 이동했다. 날씨가 개는 것 같았다. 초입을 지나 계곡에 이르니 거대한 물줄기는 맹렬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하류로 내려갔다. 비는 멈추었다. 우산도 비옷도 필요가 없다. 우천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이제 그것은 짐만 되었다. 정상으로 갈수록 경사도가 급했다. 선두와 후미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구름에 젖은 습한 공기는 심신을 지치게 했다. 불어야 할 바람은 모습이 없고 흔들림 없는 숲속은 뜨거움만 가득했다.
예봉산 정상은 뾰족했다. 우천으로 많지 않은 사람들이 정상의 봉우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북동쪽에는 구름이 겉이지 않아 북한강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었다. 남쪽으로 검단산 아래 한강에는 황토색 강물이 너울을 만들어 팔당대교를 금방이라도 삼킬 것만 같았다. 미사리 조정경기장도 보였다. 하남시와 서울의 경계에 건설된 중부고속도의 차량들은 개미떼처럼 굴러갔다. 구름은 점점 하늘높이 솟아올랐다. 보이는 시야가 넓어지면서 하나둘씩 탄성을 자아냈다.
하산하는 길은 직선코스를 택했다. 질척이는 길을 이용하여 내려오는 길은 에너지 소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급경사로 무릎에 무리를 주어 빠르게 걸을 수도 없었다. 비는 보슬보슬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쓸까 하다가 그냥 맞았다. 머리에 부딪치고 내려가는 빗방울은 너무너무 시원했다. 팔당역에 다시 도착하였을 때는 한줄기 소낙비가 내렸다. 쏟아지는 빗방울은 나무와 지붕과 레일과 돌에 부딪치어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했다. 빗줄기를 뚫고 나타난 전철은 우리일행을 통째로 삼키었다. 열차는 소화액으로 포도주를 분비하여 몹시 흐늘거리게 했다. 그날 밤 마법에 걸린 친구들은 어둠속에서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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