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나의 님 고대산

말까시 2008. 12. 21. 13:37

 

 

◇나의 님 고대산

 

 

비가 내리고 있다. 내일 산행을 해야 하는데 오라는 눈은 안 내리고, 이 무슨 불청객인가. 반갑지 않은 겨울비는 창가를 뛰어 넘어 아픈 가슴을 마구 때렸다. 잠시 하늘을 원망도 했다. 미약한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한단 말인가.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두 손 모아 기도를 했다. 비야! 비야! 내일은 꼭 눈으로 바뀌어다오.


전동차를 타고 갔다. 내리었다. 다시 기차를 탔다. 디젤엔진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굉음이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소린가. 기차는 시골길을 아주 천천히 미끄러져 갔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듯 차체는 몹시 흔들렸다. 차창 가에 비친 시골풍경은 고요했다. 들판엔 비닐하우스도 보였다. 그 옆에 가을걷이를 끝내고 아무렇게 버려진 볏짚이 바람에 흩날리었다. 사람도 짐승도 보이지 않았다. 기차의 엄청난 소음에 놀란 새들만이 가끔 하늘높이 올랐다가 사라졌다.

  

“눈이다.” 갑자기 기차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창가 너머 들판 끝자락에 우뚝 솟은 봉우리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다물어져 있던 입에서는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렇게 학수고대 했던 눈이 내리었던 것이다. 서울 하늘에서는 비였던 것이 북쪽으로 가면서 눈으로 바뀐 것이었다. 하늘아 고맙다. 구름아 고맙다. 어제저녁에 기도한 보람이 있었다. 계속하여 하얀색의 향연은 고대산 까지 이어졌다.


승용차를 이용하여 미리 도착한 친구들은 고대산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처음 보는 친구도 있었지만 대부분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산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눈은 다져있었다. 좀 미끄러웠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입에서는 하얀 수증기를 마구 뿜어냈다. 경사도가 급했다. 숨소리가 가빠졌다. 아직 뜨거워지지 않은 몸에서는 오르는 것이 벅찬 듯 속도를 내지 못했다.


정상으로 향하면 할수록 눈의 깊이는 더해 갔다. 나무에 걸친 눈꽃들은 선명했고 그 안에 있는 친구들은 붉은 단풍이었다. 하얀 눈밭에 검붉은 점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꽃이 되었다. 사람과 자연은 한 폭의 동양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꽃들은 움직였다. 피고지기를 반복한 끝에 칼바위에 도착했다. 바라다 보이는 풍경은 차가웠다. 끝없이 펼쳐진 능선과 능선은 하얀 비단이었다. 살포시 누워 포근함과 따뜻함을 느껴보고 싶었다. 이미 마음은 능선을 타고 저기 북녘의 하늘을 달리고 있었다. 순간 행복했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쏟아졌다. 장난기 심한 친구들의 힘에 의하여 나뭇가지는 흔들리었다. 살포시 앉아있던 눈은 바로 곤두박질 쳤다. 머리에 쏟아진 눈은 목을 타고 내려갔다. 차가움에 놀란 살갗은 경련을 일으켰다. 넘어지고 엎어지고 뒹굴어도 상처가 나지 않았다. 눈이 매트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오래되지 않은 눈은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살에 닿아도 차갑지 않았고 오히려 시원했다.


정상은 고요하고 평평했다. 바람 한점 없다. 미리 도착한 친구의 정성에 주린 배를 채우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술도 많았다. 양주에 소주, 매실주 한겨울이라 그런지 막걸리는 없었다. 물 먹듯 마신 알코올은 맑고 깨끗한 공기에 희석되어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정에 취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한참을 이어갔다.


하산하는 길은 미끄럼틀이었다. 어제 내린 눈이라 미끄러움이 덜해 우린 그것을 즐겼다. 시간이 꽤 흘렀나 보다. 산 아래 도착했을 때는 어둠이 내리었다. 우정하나하나 세어보니 누구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 산신령님게 꾸벅 절했다.


욕쟁이 할머니가 구워준 주먹고기를 먹으면서 다시 한번 우정을 확인했다. 장작불에 달구어진 불판은 온몸을 데우고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상기된 얼굴을 마주보며  멋진 산행을 추진한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드럼통의 열기와 친구들에게서 피어오른 끈끈한 우정은 모자위의 마지막 눈까지 사르르 녹여버렸다.

 

 

                                ▲ 신탄리역 근처에 있는 욕쟁이 할머니 집 주먹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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