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얘기

식목일의 아픈 추억

말까시 2016. 4. 5. 10:44

 

◇ 식목일의 아픈 추억

오늘은 식목일이다. 아침 일찍 식목행사를 하기 위해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벌거숭이산들이 녹화 한 끝에 푸름을 되찾았다. 이때쯤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 나무를 심겠다는 생각으로 묘목을 사곤 한다. 울타리 주변에 심어 놓은 과실수가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는 가짓수를 늘린다. 올해는 또 무엇을 심어야 할까.

초등학교 시절 식목일이면 의례히 동원되어 나무를 심었다. 집집마다 동원된 사람들은 뒷산에 올라 할당량을 채우느라 구슬땀을 흘려야 했다. 마을 강 건너 군부대에서 지원 나온 군인들도 산을 누비며 나무를 심었다. 골목에서 놀다가 군인들의 호령에 붙들려가 강제로 나무를 심어야 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나무심기, 신작로 작업에 동원되었지만 보상은 일체 없었다.

초등학교에도 묘목이 다발로 트럭에 실려 왔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학년별로 할당량이 정해져 고막 손으로 나무를 심었다. 곡괭이로 파고 삽질을 하여 나무를 심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어린나이에 호령하는 선생님의 말에 농땡이를 칠 수 없었다. 빨리 끝내야 된다는 독촉에 쉴 틈도 없이 나무를 심다보니 하늘이 노랬다.

4학년 담임은 학기 초에 전근해온 호랑이 선생님이다. 대나무 뿌리를 들고 다니면서 호통 치는 선생님은 체벌이 심했다. 그 선생님이 곁에 오면 무서워서 떨어야 했다. 주말에 당직 여선생님을 놀렸다는 이유로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종아리를 맞아야 하는 수모를 안겨준 선생님이기도 하다. 조회대에서 내려오는 아이들을 발길로 걷어차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쨍하고 빛났던 태양은 어느새 서산마루에 다다랐다. 좀 있으면 어둠이 밀려 올 것만 같았다. 아직도 묘목은 많이 남아 있었다. 지치고 힘들고 목이 말라 고통을 호소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교장선생님도 나무 심는 일에 동참하고 있었지만 그만 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묘목을 다 심어야 끝낼 판이었다.

폭력을 스스럼없이 행사하는 호랑이 선생님은 산을 누비며 남은 묘목을 땅에 묻으라 했다. 양심의 가책이 있었지만 명령에 거역할 수 없었다. 선생님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아이들이나 선생님이나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무 심는 일은 종결되었다. 귀가하는 내내 땅에 묻은 나무를 생각하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랑이 선생님과 처녀선생님이 사라졌다. 시골 작은 학교에 난리가 났다.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했다. 우린 한동안 자습으로 배움을 익혀야 했다. 처녀 선생님은 5학년인 우리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동네 사랑방에서 자취를 했었다. 호랑이 선생님은 유부남으로 처녀선생님을 귀찮게 했다. 자취방을 드나들기도 했다. 우리들의 마음은 불안했다. 호랑이 선생님이 미웠다. 불륜이 발각된 것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사도 못하고 떠나야 했던 담임선생님은 편지 한통으로 미안함을 대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