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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찌 잊으랴(아버지 이야기)

말까시 2015. 6. 25. 10:35

 

 

 

◇ 아! 어찌 잊으랴 6.25(아버지 이야기)

나는 1927년 9월 24일 충청도 어느 산골 마을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채 성인이 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사랑은 전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님은 16세에 결혼을 했다. 형수님이 19세이니 누나하고 결혼한 격이다. 어머니가 없으니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다. 학교는 문턱도 가보지 못하고 매일 나무해오는 일을 도맡아 했다. 일제 강점기라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허기진 배를 일으키고자 칡뿌리를 캐먹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며 연명했다.

온 가족이 고민에 빠졌다. 집집이 한 명씩 징용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형님은 장남이니 집안을 이끌어 가야하고 동생은 너무 어려 보낼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의 결정에 두말할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일본으로 아니면 전쟁터로. 살아올 수 있을까. 잠 못 이루는 밤이 지속되었다. 고향에서 보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열차는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직직 폭폭 기적소리는 처량했다. 어린나이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끌려가는 처지를 비관,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앞섰다. 이틀간을 달리고 달린 끝에 내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신의주였다.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우릴 태운 트럭은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트럭은 수풍댐공사장에 우리를 부리고 사라졌다.

댐 공사에 동원된 나는 지쳐 쓰러지기를 반복하며 버텨 냈다. 완전 수작업으로 댐을 만드는 공사는 하루에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 갔다. 지게에 흙을 담아 짊어지고 방죽을 쌓는 곳까지 이동하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고된 일에 몸은 여위어 갔다. 다행히 강철 체력으로 버틴 끝에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해방이 만들어준 행운이었다.

고향에 와서 결혼하고 재미나게 살 즈음 6·25전쟁이 발발했다. 인민군이 밀물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마을마다 젊은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걷고 걸어서 달리는 트럭에 매달려 한 달여를 고생 끝에 진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바로 징집되어 제주도로 보내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버려진 우리는 산에서 나무를 잘라 움막을 지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벌판에서 총검술을 배우고 바로 삼척 전쟁터로 보내졌다. 총알이 쏟아지는 전쟁터는 우수수 낙엽이 떨어지듯 전우들이 쓰러져 나갔다. 춥고 배고프고 공포에 질려 자해를 하는 전우들도 있었다. 발각되면 바로 총살이다.

휴전협정이 성사되자 전쟁이 멎었다. 나는 최전방 휴전선에서 쓰러진 전우들을 수습했다. 인민군들도 고지로 올라와 시체를 수습했다. 잠시 쉬는 틈을 타서 인민군과 악수를 나누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서로를 위로 했다. 수많은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조명지뢰를 밟아 한 달 동안 고생한 것 빼고는 사지 멀쩡하게 제대를 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수풍댐에서 고생하고 전쟁터에서 심신이 피폐해져 술과 담배를 즐기다 보니 59세 짧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주소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