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시간여 뒤를 보지 않고 걸었던 그녀
입동이 지나고 소설이 다가 올 무렵 그녀를 만나러 나가는 사내는 으쓱했다. 눈이 내릴 것만 같이 하늘은 구름을 드리우고 무겁게 짓눌렀다. 옷깃을 여미어 바람구멍을 차단했다. 환절기라 그런지 어깨가 움츠려 들고 아랫도리가 썰렁했다. 가로수에서 떨어진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나뒹굴고 포장마차 어묵 솥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라왔다. 짓이겨진 낙엽들은 바람에 날려 날아갔다. 그녀는 <꽃다방>에 먼저 와 있었다.
다방에는 어두컴컴했다. 애연가들이 내뿜은 연기는 홀 안을 뿌옇게 만들었다. 목이 따가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출력이 미약하여 역부족이다. 그녀는 목이 칼칼한지 엽차를 마셨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다가온 김양은 차를 주문하라며 다가와 머뭇거린다. 늘 마시던 커피를 시켰다. “언니, 여기 커피두잔”을 외치고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다른 테이블로 갔다. 그녀는 따뜻한 엽차 맛에 길들여진 것처럼 두 손을 꼭 잡고 마셨다.
목도리가 드리워져 있지 않는 그녀의 목덜미는 하얗게 빛났다. 목도리는 다소곳이 개어 외투에 놓여 있었다. 실내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연탄난로에서 나오는 열기가 공기를 데우고 공기는 그녀의 얼굴을 불그스레 만들었다. 무엇인가 불만이 있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는 창문을 주시한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조금 늦게 나타난 사내의 행동에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사내는 조용히 앉아 있어야 했다. 엽차를 다 마시고 커피가 나오기까지 침묵은 이어졌다.
이 무슨 행운이란 말인가. 창밖에는 진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빨리 나가 하늘을 보며 눈을 맞고 싶은 사내는 그녀를 살폈다. 굳었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감지되었다. 눈이 그녀의 마음을 녹인 것 같았다. “왔습니까.” 하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불안 했던 마음이 풀리면서 긴장이 머물러 갔다. 다방 안에는 쌍쌍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청춘남여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담배연기는 안개를 방불케 했다. 커피가 바닥이 드러나자 자리를 떴다.
눈 오는 길을 둘이 걸었다. 눈은 내리는 족족 녹아내렸다. 그녀를 안지가 얼마 되지 않은 사내는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팔짱을 끼고 가는 연인들이 부러웠다. 그녀는 심성이 너무 고와 행동에 있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히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이 여리다. 슬며시 손을 잡아보았다. 격렬하게 뿌리친다. “얼마나 만났다고 무뢰하기 시리 숙녀의 손을 함부로 잡스니까.” 하고는 빠르게 달려갔다.
사내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눈 오는 날 이무슨 망신인가. 첫 만남도 아닌데 손 한번 잡았다고 버럭 화를 내며 달아나는 그녀가 미웠다. 그녀의 마음은 굳게 다쳐 있었던 것을 모른 채 사내의 행동이 성급했던 것이다. 연애학을 배우고 싶어도 교과서도 참고서도 없다. <선데이 서울> 부록에서 본 연애담은 뜸 드리지 말고 덥석 잡으라 했었다. 아!!! 그것이 모든 이의 정답일 순 없었던 것이다.
토라져 가던 그녀는 뒤도 안보고 걸었다. 궁금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사내 역시 그녀를 추월하지 않았다. 자존심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대단한 고집불통 이들이다. 둘과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사내는 포기 한 듯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한 시간여 가는 동안 뒤를 보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녀를 한동안 보지 못했다. 눈 내리던 날 세상은 온통 축제분위기였는데, 그렇지 못한 그녀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를 입었는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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