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돼지 잡는 날
이번 주말부터 귀성전쟁이 시작된다. 자가용이 없던 시설 귀성표를 예매하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예매를 하고 여유 있게 기다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암표를 사거나 비싼 관광버스표를 구해야 했다. 어렵게 구한 귀성표라 할지라도 고향마을까지 다다르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이용해야 했다. 커다란 선물보따리를 이고지고 가는 길은 고행 길이 아닐 수 없었다.
추석이 다가오면 제사상에 올릴 음식준비로 무척 바쁘다. 농사지어 만들어 놓은 곡식과 호박꼬지, 고사리, 울타리에서 채취한 까죽잎을 꺼내 손질을 해야 한다. 송편을 만들기 위해 솔잎도 따다놓아야 한다. 전을 부치기 위한 명태포, 배가 누런 조기, 탕을 끓이기 위한 합자(말린홍합) 등은 읍내에서 사와야 한다.
추석 바로 전 장날을 대목장이라 해서 마을 어른 들 대부분이 장에 갔다. 십리 남짓 거리를 걸어서 갔다. 대목장은 옷가지를 비롯하여 과일, 수산물 등 먹거리들이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해질 무렵 장에서 돌아온 엄마는 보따리를 풀어 제사음식을 정리했다. 하지만 돼지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명절이 아니고서는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다. 조상님 제사를 지낼 때 자정까지 자지 않고 기다려야 탕국에 있는 고기 몇 점을 얻어먹을 수 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돼지고기를 사와도 보관할 곳이 마땅찮다.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돼지고기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고 하루전날 읍내까지 나가 고기를 사올 여력이 없다. 마을 사람들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흑돼지를 점찍어 놓았다가 추석 삼일 전에 잡았다.
돼지 잡는 날은 애나 어른 모두 즐거웠다. 돼지를 꽁꽁 묶어 마을 공동우물까지 지고 왔다. 건장한 청년이 도끼로 머리를 내리치면 기절해버린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목덜미에 칼을 깊숙이 찌르면 시뻘건 피가 쏟아진다. 양동이에 받아 순대를 만들어 먹었다. 숨이 끊어지고 나면 묶여진 발목을 풀어 털을 밀어냈다. 시커멓던 돼지가 하얀 살을 들어낼 때까지 면도질을 한 다음 배를 갈랐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우물가 주변에 둘러앉아 눈이 빠지라 쳐다보았다. 능수능란한 칼솜씨에 제일먼저 밖으로 나온 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어른들은 잘게 썰어진 생간을 왕소금에 찍어 먹었다. 아이들은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피가 묻어 있어 징그럽기도 했지만 생으로 먹어본 적이 없어 나서는 애들이 없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오줌보였다. 밀집을 이용하여 바람을 불어 넣으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공이 없던 시절 축구를 하는데 요긴하게 쓰였다.
우물가에서 손질을 마친 돼지고기는 마을사람들에게 팔려나갔다. 돼지 잡던 날 제사상에 올릴 만큼 떼어놓고 찌개를 끓여 맛있게 먹었다. 내장은 가마솥에 넣고 푹 삶아 마을 어른들 잔치 상을 차리는데 쓰였다. 뜨거운 국물에 내장을 썰어 넣고 파를 넣어 간을 맞추면 <돼지국밥>이 탄생한다. 푸성귀만 먹다가 구수한 국밥을 배불리 먹다보면 밤에 설사를 하곤 했다. 평상시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과 새 옷을 입을 수 있는 추석은 예나 지금이나 좋은 날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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