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답에 물이 들어가던 날
◇ 천수답에 물이 들어가던 날
산과 들에 드리워진 푸른색은 하루가 다르게 짙어만 간다. 꽃들은 피고지고 가지는 나뭇잎으로 뒤덮여 그늘을 만들었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에 버섯이 뿌리를 내려 자태를 뽐냈다. 계곡은 물이 없다. 바싹 마른 산책로는 먼지를 만들어 휘날린다. 어디선가 날아온 새들은 사람들이 있는 주변을 맴돌았다. 나뭇가지에 나타난 청솔모도 먹잇감을 포착했는지 두리번거린다. 늦은 봄 숲속에는 무수히 많은 생명체가 꿈틀대고 있다.
천수답에 비가 내려 물이 고였다. 독새풀 사이로 물이 스며들자 물방개가 헤엄쳐 나타난다. 땅속 깊숙이 숨어 있던 미꾸라지도 고개를 내민다. 두엄이 쌓인 곳에는 우렁이들이 바글바글하다. 며칠사이 커버린 우렁이는 호두알처럼 굵다. 논가에 검은 개구리 알들이 즐비하다. 논두렁에 꽈리를 틀고 일광욕을 즐기는 꽃뱀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논바닥을 가라 엎기 전에 우렁이도 잡고 미꾸라지도 잡아야 한다.
봄비가 내릴 때마다 한 뼘씩 커가는 보리는 바람에 흔들려 물결을 만든다. 하늘 높이 솟아 오른 종달새는 신나게 울다가 곤두박질친다. 날뛰는 소를 잡고 끌려가는 농부는 엎어지고 자빠져 고삐를 놓친다. 밀밭으로 숨어든 황소는 나올 기색이 없다. 발에 짓이겨진 밀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상처 난 농심은 한동안 치유 할 수 없는 고통에 빠져든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형체가 없다. 맨발로 뛰어노는 아이들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칠 때마다 코를 훌쩍인다. 땀과 먼지가 범벅이 된 얼굴은 새까맣다. 고무신이 장난감 되어 놀이에 이용된다. 붕붕 소리를 내며 밀고 당기다보면 싸움이 일어난다. 씩씩거리며 잘잘못을 따지다 흙을 집어 얼굴에 던진다. 순간 드잡이가 시작된다.
흙먼지가 들어간 눈을 비벼대는 아이는 울음을 터트린다. 아이는 엄마에게 달려간다. 엄마는 눈을 까고 입으로 불어 티끌을 빼낸다. 꼬질꼬질한 아이를 우물가에 끌고 가서 물을 끼얹어 문지른다. 까맣던 얼굴이 하해진다. 콧잔등을 잡고 코를 풀게 하고는 치맛자락을 걷어 올려 얼굴을 닦아 준다. 뽀얀 얼굴로 변한 아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먹을 것을 찾는다. 엄마는 고무신을 벗어 등짝을 후려치고는 채근하는 아이를 이끌고 집으로 간다.
낮에 잡아온 우렁이를 해감하고 된장을 풀어 한소끔 끓여낸 엄마는 가마솥에서 하얀 쌀밥을 고봉으로 퍼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은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푹 퍼진 쌀밥은 반찬 없이 먹어도 달짝지근하니 맛있다. 텃밭에서 방금 뜯어 버무린 하루나 겉절이는 미각을 자극한다. 정구지도 낫으로 벼서 다듬어 놓았다. 우렁이 된장국에 넣으면 시원함을 더해준다. 푸성귀로 차려진 저녁 밥상은 아버지가 수저를 드는 순간 달려든 아이들은, 젓가락을 번개처럼 움직인다.
커다란 그릇에 숭늉이 담겨져 들어온다. 구수함이 일품인 숭늉을 한 사발 마시고는 트림을 하는 것으로 식사는 끝난다. 낮에 신나게 뛰어논 아이들은 스르르 잠이 오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엄마는 구멍 난 양말을 기우느라 밤늦게까지 바늘과 씨름한다. 아버지 역시 농사일에 지쳐 아랫목을 차지하고 누어 잠잔다. 모두 잠이 든 사이 엄마는 문단속을 하고 새우잠을 청한다. 소싯적 고단한 또 하루가 이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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