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까시의 추억

엄마가 해준 고봉쌀밥

말까시 2014. 3. 21. 14:51

 

 

◇ 엄마가 해준 고봉쌀밥

 

황사가 날아와 흐렸던 세상에 봄비가 내리자 보란 듯 하늘이 맑아졌다. 그 틈을 타고 쏟아진 햇살은 대지의 온도를 높였다. 호시탐탐 노리던 새싹들은 일제히 흙더미를 밀고 올라와 고개를 들었다. 웃자란 냉이는 꽃대를 만들어 접근을 막았고 솜털처럼 가녀린 쑥은 빗물을 머금고 볕이 들자 쑥쑥 자라고 있다. 지난해 운치를 더해 주었던 갈대와 억새는 하나 둘 베어지고 텅 빈 공간에 새들이 날아든다. 이쯤 되면 쌀이 떨어지고 꽁보리밥이 주를 이룬 밥상에는 먹이쟁탈전이 벌어진다. 엄마가 해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봉쌀밥이 그리워진다.

 

가마솥에서 뿜어지는 김은 압력솥 못지않게 강력하다. 장작불에 달구어진 가마솥은 쌀을 불리고 골고루 익혀 맛있는 밥을 만들어 낸다. 압력을 주지 않아도 솥뚜껑의 무게만으로도 충분하다. 빠져나가지 못한 열은 밥알 하나하나에 뜨거운 기운을 전달하여 기름이 잘잘 흐르게 하고 밥맛을 좋게 한다. 엄마의 손기술과 무쇠 솥의 보온기능이 함께한 쌀밥은 수백 년간 이어온 주식이었다.

 

‘밥심으로 산다.’고 했다. 밥상머리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흐르지 않을 때까지 퍼 담은 공기 밥을 보며 입맛을 다시곤 했다.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기 무섭게 달려든 아이들은 일순간에 해치우고 주변을 살핀다. 혹여 아버지가 밥을 남기지 않을까 노리고 있는 것이다. 배터지도록 먹었지만 놀다보면 금방 꺼지고 만다. 어른들 역시 힘든 농사일을 하기 때문에 새참을 먹지 않고는 일을 할 수가 없다. 푸성귀로 차려진 반찬은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역할이 제로에 가깝다. 소화속도가 빠른 탄수화물은 쉽게 장으로 내려가 늘 허기진 배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찾고 있다. 

 

겨울식량으로 큰 역할을 하는 고구마도 봄이 되면 동나기 시작한다. 먹을 것이 귀한 그 시절 밖에 놀러나갈 때면 양쪽 호주머니에 고구마를 집어넣었다. 배고플 때 주변을 돌아보아도 먹을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생고구마를 한입베어 우지직 씹어 삼키면 허기를 면하는데 제격이다. 고구마도 떨어지고 달리 먹을 것이 없는 초봄에 아이들은 산에 올라가 굵직한 칡을 캐먹곤 했다. 갈근이라고 하는 칡은 바싹 말려 한약재로 쓰이고 칡 냉면의 재료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고봉쌀밥이 사라졌다. 먹을 것이 풍부하다보니 밥공기의 크기가 작아진 것이다. 덩달아 쌀 소비가 줄어들자 창고에 쌓인 쌀을 보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달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 하다 보니 밀가루에 밀린 쌀은 처치 곤란에 처한 것이다. 생산량은 일정한데 소비가 줄다보니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울상이다. 무역 마찰을 방지하기 위하여 수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이래저래 묘책을 꾀하는 나라님들 머리깨나 아프겠다.

 

삼시세끼 뜨거운 밥상을 받았던 그 시절로 다시 가고픈 생각이 든다. 아침도 같이 할 수 없다. 점심은 당연이 밖에서 먹을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나니 저녁역시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 전기밥솥에는 언제 했는지 모르는 밥알이 누렇게 변해있다. 뚜껑을 열었다가 닫지 않을 수 없다. 다들 바쁘게 살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지만 하루 중 한 끼 정도는 집밥을 먹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식탁 위 바구니에는 빵과 과자가 가득 담겨져 있다. 그 옆에 라면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쌀은 청소년들의 외면으로 우리의 주식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