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처녀의 다리통에서 시작된다.
◇ 봄은 처녀의 다리통에서 시작된다.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구름이 회색빛과 하얀색으로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눈과 비를 머금은 구름은 아닌 듯 높이 올라있다. 해를 가리고 그림자를 주었다가 빛을 주기를 반복한다. 양지바른 언덕에 식물들이 양분을 뽑아 줄기로 보내는 소리가 진동을 한다. 입춘이 지나면서 변해버린 날씨는 푸른 기운을 생명체에 불어 넣고 있다. 땅속은 봄기운이 무르익어 용트림하고 있다.
한편, 한겨울보다 더 많이 쏟아진 눈 폭탄은 동해안의 교통을 마비시켰다. 처녀 젖가슴까지 차오른 눈은 약한 지붕을 강타하여 무너뜨렸다. 동해안을 찾는 관광객이 줄어 상인들의 울상이 줄을 잇고 있다. 입춘이 지나 내린 눈 치고는 대단하다. 태백산 줄기를 동서로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다양한 날씨에 놀랄 따름이다. 훈풍이 불어 쌓인 눈이 사르르 녹아 내렸으면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봄이 온다고 설레는 아낙들이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길이 없어 뒷머리를 치켜 올린다. 힐끔 창가를 보는 횟수가 잦아진다. 잠시 앉아 있는 동안 연신 하품을 하고는 일손이 잡히지 않는 듯 자판의 소리가 멀어진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들이 계획에 귀가 솔깃하다. 칙칙한 집안에서 주말을 보낸다는 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다. 같이 놀아줄 가족은 없다. 워낙 바쁜 생활에 이야기 한번 나누기도 힘든 세상에 함께 하자는 말을 붙일 수가 없다. 각자 일정대로 간섭 없이 사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지름 길이다.
“벌써 봄이 온다고, 이거 큰일 났네.” 옷 속에 감추어진 살점을 보고는 화들짝 놀란 아내의 외침이다. 두툼한 방한복을 벗어야 할 날이 머지않았다. 날씬한 여인들이 반기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팔등에 검은 반점도 지워야 하고, 목덜미에 잡힌 주름도 펴야 한다. 똥배를 줄이기는 장난이 아니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가능은 하겠지만 식이요법을 병행하지 않으면 도루아미타불이다. “허벅지에 뭉친 비곗덩어리를 근육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이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뜀박질을 해볼까. 헬스클럽을 가볼까. 아이 난 몰라.” 딸내미의 하소연이다. 내 다리를 보고는 아빠 닮아 그렇다고 원망을 한다. 하체가 튼튼해야 장수 한다고 달랬지만 딸내미의 원망을 잠재울 순 없었다. 서서히 기온이 오르고 있다. 장롱 속에 숨어 있는 봄옷을 꺼내 주름을 잡아야 할 때인 것 같다.
겨우내 끔쩍 않던 난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거무칙칙했던 이파리에 녹색의 기운이 감돌더니만 꽃대가 올라와 활짝 핀 것이다. 가끔 물을 주지만 적은 양분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많이 먹어 탈나는 것은 식물도 마찬가지다. 물을 자주 주면 뿌리가 썩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죽는다.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잘 가꾼다 해도 결국 죽고 만다.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식물의 운명도 사람 사는 것처럼 쉬워 보이지 않는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처녀의 다리통이 보이는 그날이 완연한 봄을 알리는 때이다. 시골에서는 농기구를 손보아야 하고 처마 밑에 달려 있는 메주를 내려 장을 담아야 한다. 방안에만 있던 노인들도 조금씩 움직여 근력을 키워야 한다. 감기기운이 있다 해서 곳 바로 병원에 달려가서는 안 된다. 스스로 이겨내는 힘을 길러야 한다. 약에 의존하는 삶은 결국 약으로 망한다. 봄기운을 내 몸에 가득 담기 위해서는 거실 창문에 붙여놓은 비닐부터 뜯어내자. 햇살의 뜨거운 기운이 가슴속을 마구 파고 들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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