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사라진 월동준비

말까시 2013. 11. 6. 17:36

 

 

◇ 사라진 월동준비

 

 

 

가늘게 비가 내리고 있다. 빗물이 더해지자 꼭지가 약한 나뭇잎은 낙하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늘과 닿은 가지는 이미 낙엽을 버려 빗물의 접촉을 최소화 하고 있다. 산산이 조각나야 할 낙엽들이 곳곳에 달라붙어 움직임이 없다. 바퀴달린 것들에 짓눌려 고착화된 은행잎은 길을 노랗게 만들었다. 우산 속에 아이들은 신발에 달라붙은 낙엽을 털어내고자 발길질을 반복한다. 겨울을 재촉하는 빗님은 어둠을 만들었다.

 

‘아이고 추워라’ 겨울이 성금 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오후부터 슬그머니 내리기 시작한 비는 열기를 빼앗아 기온을 떨어뜨리고 있다. 예전 같으면 월동준비로 부산을 떨어야 하는 시기이다. 연탄을 광에 잔뜩 쌓아 놓아야 한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겨울반찬이라고는 김치밖에 없었던 시절, 집집마다 여러 개의 김칫독을 묻어야 했다. 불이 잘 들도록 고래를 뚫어주어야 한다. 막힌 고래를 뚫어주는 전문 직업군도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면 구멍 난 양말도 기워야 한다. 아무리 질긴 나일론 양말이라 할지라도 밖에서 뛰놀다보면 금방 구멍이 난다. 작은 구멍이야  감아 꿰매면 되지만 큰 구멍은 헝겊을 덧대어 박음질을 해야 한다. 몹시 가난 했던 그 시절 겨울을 나기 위해선 많은 지혜가 필요 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농한기가 시작된다. 광에는 쌀이 가득하고 각종 곡식들이 빼곡하여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다. 농촌에서 돈을 만져볼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외상으로 사온 비료 및 농약 값을 지불하고 나면 두둑했던 호주머니가 가벼워진다. 아이들 학자금을 위해서 저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추곡수매가 끝나면 농협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저축하라고  다니면서 반강제로 돈을 갈취해갔다.

 

메주콩을 깨끗이 세척하여 가마솥에 넣어 오랫동안 삶는다. 삶는 동안 구수한 냄새는 고샅을 빠져 나가 마을을 감싸 돈다. 덩달아 뜨거운 아랫목은 벌겋게 달아올라 장판이 타는 경우도 있다. 잘 삶아진 콩을 절구질 하는 엄마는 구슬땀을 흘려야 했다. 사각나무틀에 천을 깔아 그 위에 잘 찌어진 콩을 넣고 발로 밟아야 한다. 아이들도 밟아 다지는데 한목을 했다. 윗목에 일렬로 늘어놓아 어느 정도 말린 다음 짚으로 묶어 처마에 매달았다. 이듬해 봄이 되면 잘 익은 메주를 소금물에 넣어 된장을 담았다.

 

오직 된장만으로 맛을 내던 시절, 교복을 사면 졸업할 때까지 입어야 했다. 오래 입으려면 넉넉한 품을 사야 한다. 삼년을 입고나면 엉덩이가 헤져 누비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학생들의 엉덩이는 여러 번 누빈 흔적이 역력하다. 지금은 철따라 교복이 있지만 그때는 하복과 동복뿐이었다. 부잣집아이들 빼고는 대부분 학생들은 한벌로 삼년을 버텨야 했다. 삼년 째 되는 겨울, 가장 멋지게 입어야 할 시기에 엉덩이는 누더기가 되고 만다. 사춘기로 예민한 시절 여학생이라도 지나가면 낫뜨거워 피하기 일쑤였다. 불장난이 심했던 아이들은 옷에 불구멍이 나서 혼나기도 했다.

 

지금은 서둘러 김치를 담지 않아도 된다. 난방도 스위치만 넣으면 저절로 온도조절이 되어 수고를 드릴 필요가 없다. 먹거리는 마트에 가면 넘쳐난다. 두꺼운 이불과 겨울옷을 꺼내는 것 말고는 딱히 월동준비가 필요 없는 것 같다. 아프지만 않다면 참 좋은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