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이 내리면 오들오들 떨어야 했던 유년시절
◈ 이슬이 내리면 오들오들 떨어야 했던 유년시절
하얀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白露)가 내일이다. 하늘은 몹시 파랗고 바람은 제법 꼬들꼬들하다. 시린 옆구리로 파고드는 찬바람은 일순간에 배꼽까지 전달된다. 하루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여름 내내 사내들을 가슴 뛰게 했던 하얀 피부는 팔소매를 길게 늘어 뜨려 감추었다. 들판에는 벼들이 익어 고개를 숙이고 과일은 붉게 물들어 여물어 가고 있다. 사과향이 물신 풍기는 들녘에는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몸부림쳐 변태를 꾀하고, 날아다니는 잠자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들한들 피어 있는 코스모스는 셔터 소리에 파르르 떨었다.
어둠이 내리면 가을은 더욱더 바짝 다가온다. 희미하게 보였던 수증기는 밤이 되면 짙어져 그 높이가 증가한다. 늦은 시간 오랫동안 노천에 노출되다보면 이슬로부터 공격을 피할 수가 없다. 더러운 공기는 습기에 갇혀 오두가두 못하다가 사람에 달라붙어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 초가을 뜨거움이 사그라지지 않아 자정까지는 무차별 공격을 피할 수 있지만 서서히 냉각되어 새벽이 되면 오물을 뒤집어 쓸 수가 있다. 이제 새벽까지 주구장창 마셔대는 주당들은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지 않으면 한방에 훅 갈수가 있다.
이슬이 내리면 바람이 가르는 소리가 문풍지를 타고 안방까지 전해진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구들에 열기를 불어 넣어야 한다. 유년시절 온가족이 한방에서 잤다. 커다란 이불하나로 덮고 자다보면 구들이 식어 추위를 느끼면 밀고 당기는 이불은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다. 힘이 부족한 막내는 서러워 울어야 했다. 엄마와 아버지의 보호가 없다면 막내는 냉골인 윗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오늘은 무사히 추위를 모르고 잘 수가 있을까. 저녁이 되면 막내는 늘 걱정이 앞섰다.
저 멀리서 아버지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만취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 엄마는 우리들을 깨워 옷을 입혔다. 잠시 후 피신명령이 떨어진다. 밤공기가 차가운데 어디로 간단 말인가. 주폭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면 아버지가 주무실 동안 잠시 피해 있어야 했다. 두툼하게 뒤집어쓰고 방문을 나서는 우리가족은 빚쟁이 몰래 야반도주하는 모습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일단 부엌에 가서 쪼그려 앉아 기다린다. 그나마 온기가 조금 남아 있는 부엌으로 피신하는 것이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무리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어도 집안 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부엌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더 멀리 피신처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시간여를 밖에서 떨다보면 이슬은 얼음이 되어 괴롭혔다. 아버지가 지쳐 쓰러져 주무시면 공습경보가 해제되고 흩어져 있던 가족이 다시 모여 잠을 청한다. 언제 일어나 폭력을 행사할지 몰라 노심초사 불안한 밤을 보내야 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한기가 되면 농촌의 아버지들은 술과 놀음에 빠져 이듬해 봄이 될 때까지 가족의 속을 끓였다. 만취된 상태로 밤길을 걷다가 도랑으로 넘어져 동사한 분들도 많다. 술병 나서 환갑을 넘기기도 어려웠다. 없는 살림에 자식들은 주렁주렁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모진 구박에도 꿋꿋이 버텨내 가족을 이끌어낸 것은 우리들의 어머니이다. 추운 겨울 공습경보와 경계경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울려야 했던 어머니는 늙고 늙어 시골 작은 집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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