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얘기

여인의 향기로 가득한 지하세계

말까시 2012. 8. 29. 14:50

 

 

◇ 여인의 향기로 가득한 지하세계

 

무척이나 쎈놈이 해안가를 갉아먹어 어민들이 망연자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검게 그을린 얼굴 주름진 계곡을 타고 내리는 눈물은 슬퍼 흘리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결정체가 굴러가는 것이다. 대형 화물선을 두 동강 나게 하고 양식장을 초토화 시킨 이번태풍 ‘볼라벤’은 뒤 따라오는 ‘덴빈’에 밀려 쏜살 같이 달아나고 말았다. 강풍을 동반한 거대한 태풍이라 겁먹었지만 폭우가 동반되지 않아 그나마 내륙은 피해가 덜한 것 같다.

 

요즈음 하루가 멀다 하고 내리는 빗님 때문에 대중교통을 타고 출퇴근하고 있다. 이천 원 남짓 들어가는 교통비는 가정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고 하지만 여러 날 거듭되다 보면 생각보다 큰돈이다. 더 큰 문제는 자전거를 탐으로 해서 날렵했던 몸매가 흐트러지면서 어깨근육이 뭉치고 다리가 저려 무거워졌다는 것이다. 계속하여 비가 내린다고 하는데 건강에 적신호가 켜질까 사뭇 걱정이 앞선다.

 

지하의 세계는 무척이나 바쁜 사람들로 가득했다. 경사도가 급한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날아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이삼 분 간격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인데도 불구하고 마구 뛰는 이유를 모르겠다. 조급함에서 습관화된 것이 고착화 되어 저절로 뛰는 것이 아닐까. 지하철 출근이 반복되다보니 옆 사람이 뛰어가면 발걸음이 빨라지고 나도 모르게 뜀박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멈춘 적이 있다. ‘남이 장에 가니 거름지고 나선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하천의 고수부지 위를 달리며 출퇴근하는 풍경과 지하의 세계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하천을 따라 잘 조성된 산책로에 아침 운동을 위하여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지하의 세계는 젊음이 넘쳐난다. 강물과 녹색물결을 감상하며 달리는 기분이 쏠쏠한 반면 지하의 세계는 정거장마다 타고 내리는 아리따운 여인들을 보는 즐거움 또한 근사하다. 여인의 향기로 가득 찬 객실 내에는 쭉쭉 뻗은 젊은 여인들의 종아리가 고드름처럼 줄줄 해서 남정네들의 시선을 사로잡고도 남는다.

 

지하철 좌석에 경로석을 비롯하여 임산부가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예전보다 많이 늘었다. 시민 의식이 높아져 그런지 자리가 비어 있음에도 앉으려 하지 않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스마트폰을 두들겨 무엇인가를 검색하느라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엄지손가락 두 개를 사용하여 번개처럼 문자를 만들어 날리곤 했다. 대단한 타자 실력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한 가지 특이 한 것은 지하철에는 남성보다 여성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빼곡히 들어 있는 출근길 지하철 내에서 시선을 둘 데가 마땅찮아 곤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양 옆에 여성이 앉아 있을 때도 마음은 편치가 않다. 전날 술이라도 한잔하면 피곤해 지쳐서 잠시 졸다가 고개가 흔들려 접촉이라도 하면 오해를 살수도 있다. 성추행으로 몰아 고소를 하면 아야 소리도 못하고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지금 하늘은 해가 쨍쨍 내리쬐고 있다. 간혹 높은 구름이 살짝 가려 그늘을 만드는 공간도 있다. 내일부터 ‘덴빈’이 한반도로 진입하여 많은 양의 비를 뿌린다고 한다. 만반의 준비를 하여 피해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이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약간의 찬바람이 불면서 가을은 우리들 앞에 바짝 다가와 있을 것이다. 보름여동안 빗님이 안겨준 여인의 향기를 맡을 수 없어 아쉽지만 직직한 지하의 세계에서 빨리 빠져 나와 탁 트인 푸른 공간을 마구 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