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여심
날카롭던 공기가 무디어졌다. 태풍을 방불케 했던 강풍도 사그라지어 부드럽기가 비단결이다. 하루사이 포근해진 날씨는 여인의 의상을 바꾸어 놓았다. 두툼한 외투에 가려졌던 허리의 곡선이 확연이 드러나 보기 좋다. 용감한 아가씨들은 허연 넓적다리를 드러내놓고 큰길을 제 마당인양 활개를 치고 다닌다. 고딩들도 허리춤을 발끈 추켜올려 동여맨 치마 끝이 무릎위로 올라가 민망스럽다. 긴 머리 소녀들이 재빨리 반응하는 것을 보니 봄바람은 여심을 사로잡아 마구 흔들고 있는 것이다.
하천 뚝방에 자리 잡은 갯버들이 하얀 솜털을 내밀고 낮은 봄을 알리고 있다. 바싹 말라버린 갈대 밑동에는 벌써 새싹이 한 뼘쯤 돋아나 끝이 날카롭다. 쑥 향기 물씬 풍기는 언덕에는 수건 두른 아낙이 무엇인가 열심히 뜯어 담고 있다. 냉이는 이미 웃자라 나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마구잡이로 올라오는 돌나물은 경사진 언덕을 온통 녹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새순의 몸부림에 아름드리나무 껍질에도 하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잎이 자라지 않은 산은 회색빛 물결이다. 아직은 차가운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골과 능선을 타고 오르는 사람의 모습은 울긋불긋 진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른 아침에는 삼삼오오노인들이 산길을 점령한다. 동트기가 무섭게 머리 희끗한 중년들이 무리를 지어 오른다. 해가 중천에 올라 정오가 다가오면 아주 새파란 젊은이들이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나타난다. 하루 종일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의 연령이 다를 뿐 산은 봄을 만끽하는 사람들로 넘쳐 난다.
가슴속 깊이 파고든 봄바람은 못다 이룬 사랑을 둥지 틀어 품기 시작했다.
나무와 나무사이에 빈틈으로 보이는 원색의 물결은 모두다 여인이다. 아무 곳이나 털썩 주저앉아 남편 흉을 보는지 가끔씩 폭소를 터트린다. 파장이 짧은 여인의 목소리는 나무사이를 뚫고 날아가 남정네들의 귀전에 머문다. 크게 벌리고 웃는 모습은 눈앞으로 달려와 목젖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설레는 마음 주체할 길이 없어 설거지도 마다하고 쏟아져 나온 것 같다. 봄바람은 이렇게 여인을 밖으로 끌어내는 마력을 지녔는가 보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 땅속 못지않게 인간의 마음도 쿵쾅쿵쾅 뛰고 있다. 문풍지를 파르르 떨게 하는 봄바람에 이끌리어 무수한 사람들이 문밖으로 나왔다. 따스한 햇살과 노랗게 올라오는 새싹은 꽁꽁 얼어붙은 가슴속을 부드럽게 녹여준다. 새록새록 살아나는 풋풋한 추억들이 아지랑이 넘실거리는 언덕위에 마구 그려진다. 해가 서산마루에 걸쳐 있는 늦은 시간임에도 발길은 그대로 멈추어 있다. 좋구나. 꽃피는 봄아…….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 계절에 미치도록 해보고 싶은 욕망이 넘쳐난다. 선거열풍과 함께 몰아닥친 갈망은 당장이라도 무엇인가 이루어 낼 것만 같은 자신감이 용솟음친다. 각이 다르면 보이지 않던 틈바구니가 꽃피는 봄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는 것은 그만큼 삶의 정점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상의 깃발이 찢어져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몰래 다가오는 봄바람을 걸러내고 계절이 만들어낸 꽃향기 마음껏 누려볼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