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앗아간 고향의 옛것들
“세월이 앗아간 고향의 옛것들” (2012. 3. 24.(토) 고향을 다녀옴)
봄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부서진 담장 밑에 노랗게 올라오는 새순은 가냘프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진한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만지면 뭉그러질 같은 미약한 것이 무거운 흙더미를 뚫고 어떻게 올라왔을까. 차가운 땅속에서 길고 긴 날을 웅크리고 있다가 온기를 감지하고 싹을 틔워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수줍어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다. 태양이 강렬하게 비출 때마다 자란 새싹은 머지않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우리 곁에 바짝 다가올 것이다.
시골은 아직 한겨울이다. 밭고랑 사이사이 냉이가 납작하게 엎드려 모습을 감추고 그 옆에 참새 몇 마리가 열심히 모이를 쪼아대고 있었다. 뒷산에 소나무만이 진녹색을 띄울 뿐 활엽수는 아직 새순이 돋아나지 않았다. 잎이 사라져 버린 가지에는 까마귀 떼가 날아와 검은 손짓을 했다. 먹을 것이 부족한지 지저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적막한 시골의 하늘과 땅에는 새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질 뿐 사람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들판에는 볏짚을 포장해 놓은 원형의 흰 덩어리가 군데군데 보였다. 못자리를 하기 위해 경운기로 로터리를 하고 있는 농군의 모습은 왠지 힘이 부쳐 보였다. 디젤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굉음은 살아있는 생명체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칠순도 넘어 쉬어야 할 나이에 육중한 경운기를 능수능란하게 운전하는 능력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젊은 농군은 사라지고 촌로들만이 들판을 누비고 있었다.
농사를 접은 지 오래다. 그러나 농기구는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삽, 괭이, 갈고리, 낫, 삼태기 등 셀 수 없이 많은 농기구들은 흙이 묻어 있는 모습으로 언제 사용될까 한없이 기다리는 신새가 되었다. 처마에 매달린 옥수수는 몇 년이 되었는지 쥐가 다 따먹고 얼마 남지 않았다. 곡식을 까불러 잡티를 제거하는 키는 너덜너덜 헤어져 볼품이 없었다. 가마에 나락을 담아 무게를 달아 수매를 도왔던 저울은 부식되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따뜻한 온기만 있어도 잘 자라는 대파는 마당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푸른 녹색을 마음껏 뽐냈다. 가을에 무성하게 자랐던 고들빼기는 수명을 다하고 말라 비틀어져 흉측했다. 키가 큰 엉겅퀴 역시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름 모를 잡초는 빼곡히 들어앉아 치열하게 영역다툼을 하고 있는지 색의 농도가 달랐다.
해가 들이치지 않은 뒤뜰에는 장독대가 있다. 거의 대부분 장독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소싯적 장독대에는 된장, 고추장, 간장, 김장김치, 동치미 등 먹을 것으로 가득했었다. 장시간 사용하지 않고 관리되지 않은 장독의 사각은 부서지고 깨지어 허물어졌다.
뒤뜰에 오래된 흑백텔레비전이 한자리를 잡고 있다. ‘김일’선수의 레슬링과‘타잔’을 즐겨보았던 17인치 브라운관 미닫이 TV는 먼지가 자욱하게 앉아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 옆에 아주 귀중한 물건이 눈에 확 들어 왔다. 바람이 불어도 호롱불을 꺼지지 않게 보호해주며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었던 중요한 물건이다.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에 탈색되어 모양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갈 때마다 이상한 것들이 들어서면서 변해있는 시골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상했지만 우리 집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옛것을 볼 때마다 소싯적 추억이 되살아나 아픈 마음을 달래주었다. 관리만 잘한다면 작은 박물관 하나 만들어 전시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지금은 시골에 엄마가 있어 소중한 물건들이 남아 있지만 뒤를 볼 줄 모르는 세월은 모든 것을 앗아 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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