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가족의 행복을 안겨다준 총각김치

말까시 2011. 10. 18. 09:25

 

 

 

 

우리 집 마나님께서는 자전거 동호회 가입하더니만 집안일에 신경을 안 쓰고 자전거만 생각합니다. 주말 동회에 간다면서 새벽같이 일어나 음식 장만하느라 부산을 떠는 바람에 일찍 일어나야 했습니다. 등에 짊어진 배낭 속을 몰래 훔쳐보니 생전보지도 못했던 유부초밥, 용가리치킨, 단감, 사과, 커피믹서 등 셀 수 없이 많더군요.

 

무엇이 그리 좋은지 룰루랄라 하면서 "김장김치 질렸으니까 총각김치나 담으셔" 한마디 툭 던지고는 현관문을 나서더군요.

 

마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 죽음입니다. 요즈음 자전거 덕에 허벅지가 엄청나게 굵어져 이단옆차기로 들어오면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우산을 바쳐 들고 마트에 가서 튼실한 총각무를 사와 칼로 다듬어 소금에 절였습니다. 밖에는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 치면서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서글퍼집니다. 전국의 산에는 단풍이 춤을 추고 있다는데 집에서 총각무나 다듬고 있는 나는 뭐야.

 

대파를 가늘게 썰고 쪽파는 짧게 썰어 양파와 함께 장모가 순수 담아준 멸치액젓을 넣고 버무려 놓았습니다. 대파와 양파를 칼로 써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서글퍼서 한동안 눈물을 닦지 않았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더듬고 더듬은 생각주머니는 총각시절 자취생활에서 멈추었습니다. 어데 갔다 오면 연탄불은 꺼져 있고 반찬은 없고 라면으로 연명하던 그 시절이 눈앞에 선명하게 스쳐지나가더군요. 눈물이 폭포가 되어 배꼽까지 적시었습니다. 집에서는 상의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거든요.

 

양념을 만들고 절여 논 총각무를 보니 숨이 죽었더군요. 축 늘어져 있는 잎 파리에 비해 무는 아직도 탱글탱글 뽀얗기가 백옥 같더라고요. 여름에 씨 뿌려 싹을 트고 자라서 인간에게 맛있는 김치의 재료로 남기고 짧은 생을 마감하는 총각무가 불상해지더군요. 생긴 것이 거시기 같아서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독차지 하는 총각무지만 生은 너무나 허무하지요.

 

김장김치는 통체로 담아도 되지만 금방 먹을 김치는 한입에 쏙 들어오도록 토막을 내야 합니다. 요즈음 애들은 워낙 까다로워 먹기 좋게 해주지 않으면 바로 분식집으로 달려갑니다. 잘게 토막 내어 뒤집어주기를 여러 번 하다 보니 손바닥 피부가 울퉁불퉁 거칠어지더군요. 소금이 피부를 파고 들어간 것인지 피부 속에 물이 빠져 나온 것인지. 소금과의 전쟁을 치루고 있는가 봅니다.

 

미리 만들어 놓은 야채양념에다가 풀을 쓰고 홍고추와 마늘 생강을 넣고 새우젓을 넣어 매실 액을 첨가하여 믹서로 곱게 갈아 버무렸습니다. 보기 좋더군요.

 

집안에는 매운 기운이 가득 찼습니다. 갑자기 재채기가 나오더군요. 얼마나 세게 했는지 아까운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져 곤두박질치더군요. 잽싸게 거울을 보니 정수리가 휭 하내요. 이일을 어쩌나. 앞으로도 계속하여 김치를 담아야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만든 양념에다가 총각무를 넣고 잘 버무리고 뒤집기를 여러 번 하다 보니 곱디곱더라고요.

 

멸치액젓과 새우젓이 고춧가루와 싸움을 하는지 매콤하면서 멸치의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습니다. 새우젓은 싸움판에서 졌는지 반응이 없더군요. 잘 익으면 그때 시원한 맛으로 실력발휘를 하겠지요.

 

고추의 아린맛과 젓국의 소금기는 손톱 밑의 상처를 파고 들어가 고통을 주더군요. 이 사실을 아내는 알까?

 

플라스틱 통에 담았습니다. 한 다발 사다 담았는데 야채양념을 많이 넣어서인지 가득 찼습니다. 탱글탱글한 달랑 무가 붉은 옷을 입으니 가을단풍처럼 예쁘더군요.

 

요즈음 날씨가 선선하여 서서히 발효가 되어 맛깔스럽게 익은 달랑 무를 생각하니 침이 꼴깍, 입안에는 홍수가 났습니다. 하루저녁 거실에 두었다가 냉장고에서 이삼일 더 익으면 그 맛이 환상이겠지요. 실패는 없습니다.

 

일단 한입에 물고 맛을 보았습니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살짝 짜면서 단맛이 제일먼저 신경을 타고 온몸을 흐르더군요. 1센티 더 당겨서 매운 맛, 조금 더 당겨서 쓴맛, 바짝 당겨 씹으면서 느껴지는 구수한 맛까지 더해 오감을 즐기려는 순간 컴퓨터 게임하던 아들 녀석이 맛보자고 달려들더군요.

 

아들놈은 한입에 넣고 우직하게 씹더니만 "세상에서 우리아빠가 최고다"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치더군요. 감동받았습니다. 계속하여 김치는 나의 손에 영원히.

 

거실 한 구석에 모셔놓았습니다. 김치통도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적당하게 보기 좋더군요. 김치가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지 시끌벅적하더군요. 양념과 총각무가 치고 박고 싸우는 소리에 낮잠도 못자고 두 눈 똑바로 뜨고 마나님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습니다. 이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아내를 생각하니 짠하더군요. ‘배 가죽이 좀 늘어지면 어떠나 그냥 같이 오래오래 살면 그만이지.’

 

희희낙락하며 들어오는 아내의 얼굴을 보니 안면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로 인하여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가 맞아 더러워진 애마인 자전거를 수돗물로 샤워를 시키고 마른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난 뒤 잔소리를 늘어놓더군요.

 

바닥에 떨어진 굵은 소금에 예쁜 발바닥에 상처가 났다며 당장 빗자루로 쓸어 담으라고 호통을 치더군요. 싱크대 밑에 떨어진 물방울로 엉덩방아를 찧을 번했다며 걸레를 던지며 훔치라 하더군요. 아! 울고 싶어라...

 

미우나 고우나 아내를 위해 저녁상을 차렸습니다. 고기반찬은 없지만 멸치볶음하고 방금 담은 총각김치를 곁들여 상차림을 했습니다. 많은 반찬 중에 총각김치가 제일 돋보였습니다.

 

마나님 생각은 어떠신가? 의중을 조심스럽게 떠 보았습니다. 한입을 물어뜯어 우지직 깨물더니만 흐~~음하고 평생 들어보지도 못했던 여성특유의 신음소리를 내더군요. 고추맛보다 총각무가 더 맛있었는가! 봅니다. “호호호 제법인데” 하면서 “내 다리가 총각무처럼 통통해지려면 자전거를 더 타야 하니까 앞으로도 계속하여 김치연구에 몰두하라”고 명령을 내리더군요. “네 알겠습니다.” 크게 복창했습니다. 오늘 담은 '총각김치' 대 만족입니다.